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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 위선으로 고민하던 어느 무신론자에게 일어난 기적

김성국 | 더편한몸의원 원장       찾을수록 커져만 갔던 마음의 공허함     초등학교 때 인상적으로 본 어느 만화책이 있다. 눈이며 팔 다리가 없이 태어난 한 아이가 있었는데 없는 지체는 요괴들에게 빼앗겼다는 내용이었다. 아이는 자라서 모험을 떠났고 요괴들을 찾아 물리치면서 잃었던 지체들을 하나씩 찾아가며 온전한 인간이 되어갔다. 또 동화 피노키오도 내 마음을 끌었다. 비록 나무로 만들어진 인형이지만 여러 시련을 거치면서 나중에는 인간이 된다는 이야기인데, 이런 이야기는 내게 단순한 이야기로만 여겨지지 않았다. 인생이 바로 그런 것으로, 불완전하게 태어나서 부단한 노력으로 완전한 모습을 이루어 가는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사는 것이 은연중에 내 삶의 방식이 되었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의문이 많았다. 왜 구름이 일고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는지, 또 봄에는 어떻게 싹이 나는지? 부친은 부지런한 분이셨는데 수십 년을 새벽마다 인근 산에서 운동을 하셨다. 방학이면 나도 따라다니면서 자연현상에 관해 궁금한 것들을 여쭈어 보았으나, 늘 잘 모르겠다는 대답을 들었다. 나는 그 궁금증을 속 시원히 풀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그러다 중학교에 들어가서 과학을 배우게 되면서 사물의 이치를 알아가는 것이 정말 좋았다. 자연과학이 다 해결해주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내가 좋아했던 것은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것, 답이 분명히 나오는 것인데 과학이나 수학이 바로 그런 학문이었다. 문학같이 말이라든가 글로 된 것은 애매모호했다. 모호한 것은 적성에 맞지 않고 싫었다. 그러나 숫자는 명확하고 물질의 법칙도 명확한 듯해서 수학이나 과학을 좋아했다. 그래서 어려서의 꿈은 우주선이나 로봇을 만드는 과학자가 되는 것이었다. 진화론을 배우고 물리, 화학을 배우면서 신기한 것들이 많았고, 보이는 것만이 실체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러니 보이지 않는 영(靈)이니 하나님이니 하는 것은 내게는 의미가 없었다.     중학교 2학년 때의 일로 기억한다. 같은 반에 시골에서 유학 온 키 작은 학생이 있었는데 열심히 노력하는 데에 비해 머리가 좋지 않아서인지 성적은 오르지 않았다. 성실하고 착하던 그 애는 어느 날부터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더니 학교에 와서 하나님이 있다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한번은 나도 그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데 괜히 속에서 부아가 치밀어 올라 그 친구와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그래, 네 말대로 하나님이 있다면 어디 있는 거냐?”     “저 멀리 우주 어딘가에 계시지.”     당시 아폴로 우주선이 날던 시절이라 따지기를,     “그러면 우주선 타고 가면 만날 수 있겠네.”     “그렇지.”     “그러면 그게 무슨 하나님이냐. 우리하고 같지.”     결국 그 친구는 논쟁 끝에 울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면 그렇지, 하나님이 어디 있어. 다 만들어 낸 이야기지.’ 나는 속으로 통쾌한 승리감을 맛보았다. 이상하게 하나님이라는 말은 듣기 싫었다. 또 동네에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인사하는 모습들에서 보이는 위선은 정말 역겨웠다. 그러다 보니 일요일마다 옆구리에 성경을 끼고 가는 사람은 까닭 없이 미웠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고서는 마음에 해결되지 않는 괴로움이 찾아왔다. 늘 나를 괴롭히는 것은 인간관계에 대한 것이었는데, 친구들 간, 아니면 부모 형제간의 관계에서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고 속상한 일이 자주 생기는 것이었다. 나 나름대로는 잘 대하려고 애를 쓰는데도 상대의 반응은 늘 나를 실망시켰고, 배신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이유가 무얼까 생각하면서 해결책을 찾아보던 중, 하루는 교회를 다니는 한 친구로부터 ‘네가 대접 받기를 원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바로 이거다’ 하는 생각에 그대로 시도해 보기도 했는데, 돌아오는 반응들은 대부분 기대와는 달라, 그때마다 속이 뒤집혔다.     나는 자연에 명확한 법칙이 있고 그 법칙을 알고 난 후에 답답했던 내 마음이 확 풀렸듯,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무언가 법칙이 있을 것이고,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 법칙만 찾아내면 내 마음에 있는 괴롭고 답답한 것이 해소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왠지 모르게 그렇게 생각되었다.     집안 어른들이 불교에 열심이셔서 처음에는 자연스럽게 불교에서 답을 얻으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혼자 불교를 공부해 보았다. 해탈이 답이라 하니 나도 해탈을 얻어 볼까 한 것이다. 반야심경 같은 몇몇 경전과 유신론이니 원효 사상 같은 것들을 혼자 파고들었다. 상당히 고상한 형이상학적인 내용에 한동안 빨려 들어갔다. 방학 때는 절에 가서 지내기도 하며 스님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지만 번번이 실망했다. 머물던 암자의 주지스님은 해인사의 총무를 맡은, 직위가 꽤 높은 분이었다. 선종에서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참선하는 것을 강조하는데, 그곳에서 지낸 이후로 그분이 참선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 한번 여쭤보았다.     “스님, 왜 참선을 안 하십니까?”     “요즘 바빠서 못 합니다.”     아니, 바쁘다고 가장 중요한 것을 하지 않다니? 또 그 무렵 본 어느 불교서적에서 조선말 조계종의 종정이었던 어느 스님에 대한 이야기를 읽게 되었다. 그분은 유학도 공부하고 불교에 귀의하여 해탈하였다 했는데, 해탈한 뒤의 행적들은 내게는 대단히 실망스런 것이었다. 어떤 일은 차마 말이나 글로 옮기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 말년은 개마고원의 갑산에서 서당 훈장으로 지내며 생을 마쳤다 했다. 그런 것이 해탈이라면 더 이상 찾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고, 그 후로는 불교에 대해 더 이상 미련을 갖지 않았다.     그 다음에는 유교에 대해 공부했다. 인간의 도리에 대한 것이라 혹 거기에 답이 있을까 해서 사서삼경을 탐독하기도 했다. 그중 역경(주역)이, 내가 찾던 법칙에 가장 가까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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