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대 l 축소

<2007.03> 삯꾼 목사가 얻은 진정한 자유

권신찬       주일학교 학생으로     나의 부모님은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 오래 전부터 장로교인으로 믿음의 생활을 하셨는데 아버지는 영수직이었고(나중에 장로로 안수됨) 어머니는 집사로서 부인전도회 회장직을 맡으셨다. 나는 부모님을 따라서 열심히 주일학교에 다녔다. 성경 암송대회에서나 그 외에 주일학교 학생이 탈 수 있는 상은 거의 다 탈 정도로 열심이었다. 그래서 성경의 어려운 부분은 알지 못해도 하나님이 계신 것은 자연히 믿게 되었고 남을 욕하면 지옥에 간다는 말은 어머니로부터 자주 들어서 욕을 하지 않으며 자랐다. 상스러운 욕은 해 본 기억이 없다. 내가 주일학교에 열심히 다니고 성경 공부도 남달리 열심히 한 것 때문이었는지 한번은 아버지 옆에서 잠을 자는데 잠들기 전에 아버지께서, ‘너는 자라서 목사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 한 번의 말씀이 내 생애의 목표가 되었고 그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게 되었다.       어머니와의 사별     내가 열두 살 때(당시 4학년), 어머니께서 49세의 늦은 나이에 둘째 동생을 분만하셨다. 우리는, 여덟 살 위인 누나와 세 살 위인 형, 여섯 살 아래인 여동생까지 모두 4남매였다. 뒤늦게 쌍둥이 동생을 낳으셨는데 새로 난 동생들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쌍둥이를 분만한 어머니께서도 어쩐 일인지 병이 들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셨다. 지금 같으면 병원에 가서 목숨은 건질 수 있었겠지만, 그곳은 산파도 없는 시골이었다. 설령 병원이 있다 하더라도 돈을 낼 엄두도 못내는 형편이었다.     결국 출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셨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았다. 산에 따라가서, 어머니의 관이 땅에 묻힐 때는 나도 들어간다고 하며 울고 또 울었다. 아무리 울어도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으셨다. 나는 막연하기는 했으나 부활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언젠가 부활 때에 반가운 얼굴로 어머니를 다시 만날 것이라 생각하고 겨우 견딜 수는 있었으나, 정말 어머니 없는 세상은 캄캄하고 처절하며 앞날의 희망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나의 슬픔도 컸지만 아버지의 슬퍼하시는 모습 또한 형용할 수 없었다. 장례를 치르고 집에 돌아오신 후에 밖에 서서 어머니의 무덤이 있는 곳을 향해서 하늘을 우러러보시면서 한숨짓고 실성한 사람처럼, “이 어린 것들을 데리고 내가 어떻게 살라고 먼저 가버린단 말이오” 하시면서 계속 우시는 그 모습은 정말 너무 불쌍해 보였고 처량해서 차마 견딜 수가 없었다.     항상 어머니께 귀여움만 받으며 살던 나의 생활은 끝이 났다. 얼마 후에 18세 밖에 안 되는 형이 결혼을 했다. 누님도 시집을 가버리고 집에 여자라곤 어린 여동생뿐이었다. 살림을 맡을 여자가 있어야 한다고 형이 일찍 장가를 갔는데 형수는 성품이 착하고 참을성이 있고 효성스런 여성으로 홀아비 된 아버지를 잘 모시고 살아갔다.     그때 우리집에는 방이 두 개 밖에 없었는데 방 하나는 형님 가족이 쓰고 다른 하나는 나와 여동생 그리고 아버지가 함께 쓰게 되었다. 한 방을 쓰게 되니 자연히 아버지로부터 여러 가지 말을 듣게 되었다. 나와 아버지가 거처하는 방은 예배당과 담을 하나 사이에 두고 있어 방안에서도 설교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편찮으셔서 방에 누워 계시면서 내게 “설교란 생활이 뒤따라야 힘이 있는 것이다. 행실이 설교와 일치하지 않으면 힘이 없고 감동을 줄 수 없다” 라고 하셨다. 언젠가 너는 자라서 목사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고, 나도 목사가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를 두고 하시는 말씀같았다. 그 말씀은 오랜 후에 내가 목사가 되었을 때 목회의 방향을 잡는 데 도움이 되었다.     대동아 전쟁 발발     일본인들이 대동아 전쟁이라고 말하는 제2차 세계대전은 일본군이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함으로 확전되었다. 하와이 진주만이 일본군의 공습으로 거의 파괴되었다는 뉴스가 들리자 일본 사람들은 들뜨게 되었다. 그때 나는 참으로 큰 실망감을 느꼈다. 언젠가 일본에 건너가서 공부하겠다는 꿈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기 때문이다. 하와이는 미국의 한 섬에 불과하며 본토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비록 일본군의 공습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곧 승리는 아니며 오히려 전쟁은 확대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미국이 반격을 시작했다. 비록 일본 육군이 중국과 동남아 일대를 파죽지세로 진격했으나 미군 역시 동남아로 상륙해서 일본군과 맞섰기 때문에 일본이 고전한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때 내 나이는 19세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한국 젊은이들도 군대에 가야 한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무기나 탄약이 부족해서 집에 있는 쇠붙이들을 모두 거두어간다는 소식도 조금씩 나돌았다. 전쟁이 장기화될수록 일본에 가서 공부하겠다는 희망은 차츰 줄어들어갔고 꿈이 깨져가는 것을 느꼈다.     타향 길     그 해가 저물어 갈 무렵, 아버지와 당숙께서는 내게 좋은 처녀가 있으니 결혼을 해야 한다고 했다. 세상 경험도 없고 식구를 먹여 살릴 경제력도 없는 내게는 날벼락과 같은 소리였다. 처음에는 극구 사양했으나 어른들의 꾸지람과 형님 식구들이 다 권하는 바람에 마지못해 따르기로 했다. 결혼할 상대는 당숙의 친구 되시는 분의 막내딸이었다. 그 아가씨는 인물이 꽃봉우리 같다고 모두들 탐을 내고 있었다. 큰 부잣집에서도 청혼이 들어와 사윗감을 고르고 있던 차에 청혼이 들어간 것이다. 우리 집은 비록 가난했어도 천국에 가려면 권 장로같이 믿어야 한다고 할 정도로 군 내에서는 믿음의 가정으로 잘 알려져 있었기에, 그쪽에서 상당한 매력을 느낀 것 같다. 또 18, 19세를 지나면 혼기를 놓치게 되고, 일본 정부에서 한국 처녀들을 차출해서 정신대(일본군 위안부)로 보낸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을 때였기에 더욱 결혼을 서둘렀다. 해가 바뀌어 내 나이 20세, 신부 나이 19세 되던 해 이른 봄날 결혼식을 올렸다.     고향에 있다 보면 언제 일본 사람에게 끌려갈지 모르는 상황이라 고향을 등지고 객지로 나가기로 했다. 그때 마침 누님이 남편과 서울로 이사해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서울로 발걸음을 옮겼다. 갓 시집온 신부를 고향에 두고 떠나는 것이 무척이나 가슴 아픈 일이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어디든 가서 자리를 잡게 되면 데려오리라 생각하고 떠났다.     그러나 세상 일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서울까지 가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하던 중에 김포읍에서 살게 되었다. 거기서 어떤 형사를 만나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고향 쪽 사람이라 친근히 대해 주었다. 내 사정을 말하고 보호해 주기를 부탁했다. 김포읍에서는 일정한 주민등록도 없이 살고 있었으니 식량 배급도 탈 수 없었다. 가끔씩 근처 시골로 가서 식량을 얻어다 겨우 연명했는데, 어떤 날은 시골에 식량을 구하러 갔다가 논두렁에 앉아서 하늘을 쳐다보고 눈이 퉁퉁 붓게 울었다. 내게는 없는 것이 세 가지였다. 고향과 어머니, 그리고 조국. 어머니 생각이 가시지 않았고 일제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객지로 떠도는 내 신세가 한스러워 울고 또 울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형사가 찾아와서 자신이 건수를 올려야 진급을 하는데 통 진급할 수 없으니 주변에 유언비어를 퍼트리는 사람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다. 즉 밀고를 해달라는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덜컥 겁이 났다. 죽어도 그런 짓은 할 수 없었고 협조하지 않으면 나를 고발해서 끌려가게 할 것 같아서, 아무 말도 못하고 얼버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김포에 그대로 있으면 무슨 일을 당할 것 같아 떠나기로 결심하고 시골의 처가 동리로 내려갔다. 아내는 거기서 딸을 낳아서 기르고 있었다.     해방의 기쁜 소식     내 나이 스물두 살. 동리에서 1킬로미터쯤
정회원으로 가입하시면 전체기사와 사진(동영상)을 보실수 있습니다.

이전화면맨위로

확대 l 축소



* 온라인 쇼핑몰

글소리 PDF 웹북 펼쳐보기


* PC 버전 홈페이지 전환



Copyright (c) 2025 (주)많은물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