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지역 성경탐구모임 2001년 4월 14일 저녁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세상에서 제일 괴로운 일이 있다면 아마 먹지 못하는 것보다도 잠을 자지 못하는 일일 것입니다. 성경에는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시 127:2)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잠을 자지 못하는 병은 굉장히 무서운 병입니다. 사람이 잠을 몇 시간 자야 건강에 좋은지 아시는 분 계십니까? 수년 전에 제가 방송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미국의 제일 큰 보험 회사에서 고객들을 상대로 조사 통계를 냈는데 건강에 좋다는 수면 시간이 일곱 시간에서 여덟 시간이라는 결과가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 통계에 비추어 본다면 저는 상당히 건강 점수가 낮을 것입니다. 저는 많이 자서 뭐 하느냐 하는 생각이 있어서, 잠을 많이 자는 것은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때로는 실컷 자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만, 오래 자면서 뒤숭숭한 꿈을 꾸고, 자는 둥 마는 둥 하다가 깨는 것보다는 차라리 책을 보든지 무엇이든 활동을 하다 피곤해서 그대로 잠에 빠져드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피곤해서 푹 자면 짧게 자더라도 많이 자는 것이 아닌가 하는 나름대로의 생각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책상 앞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다가 책상에 엎드려 잔다든지, 어디 기대어 잔다든지 하며 잠에 대해 연구를 자주 했습니다. 어떨 때는 의자를 뒤로 젖혀서 기대어 자고 일어나면 목이 뻐근했습니다. 또 엎드려서 자고 나면 주름살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잠을 좀 덜 자더라도 활동을 많이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나중에 보니 역시 잠을 충분히 자는 사람들이 건강했습니다.
언젠가 감리교를 시작한 요한 웨슬레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영국에서 부흥 운동을 일으킨 그는 설교하러 다닐 때 많은 시간을 말 위에서 잤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말 위에서 자다니, 생각해 보면 깊이 잠들지는 못했을 것 같습니다. 말 위에 짐처럼 얹혀서 가지는 않았을 것이니, 말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면 바로 앉아 다리에 힘을 주고 있어야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 사람은 말 위에서 그렇게 많이 잤을까? 그런데도 그는 건강했다고 합니다.
어린아기는 젖을 먹는 시간보다 잠을 자는 시간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엄마들은 “잘 자라 우리 아기” 하는 자장가를 불러 주기도 합니다. 또 적국의 스파이를 잡았을 때 잠을 재우지 않는 고문을 했다는 이야기도 책에서 보았고, 또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습니다. 잠이 없으면 얼마나 괴로울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잠에 대해서 여러 가지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다니시다가 어떤 죽은 사람을 보시고 죽은 것이 아니고 잔다고 말씀하셨다가 사람들에게 상당히 비난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마 9:24, 막 5:39-40, 눅 8:52-53) 또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자는 성도들을 데리고 오신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살전 4:14 참조) 사람이 보기에는 죽은 사람이라 장사 지내고 매장을 했는데, 하나님 편에서 볼 때 그는 자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몸이 죽어서 산화되고 있는데도 잔다고 표현했습니다. 영혼이 몸 밖으로 나가 하나님 앞에 가 있는 그 상태를 ‘잔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잠에 대한 정당한 진단을 받은 사람은 죽음 저편에 희망이 있는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으로 끝나버린다면 그만큼 불행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죽었다’는 단어와 ‘잔다’는 단어를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잔다’는 것이 우리로서는 굉장히 행복한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축복된 이야기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사람이 죽은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죽었다’라고 한다면 어떨까?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죽으면 그만이지’ 하는 생각을 하는데, 사실 그런 사람들은 참 불행한 사람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하나의 시작입니다. 영원을 향한 시작입니다. 죽음을 끝이라고 생각하면 큰일나는 것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죽음 저편에도 희망이 서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죽었다’가 아니라 ‘잔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죽음에 희망을 안고 가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소망’입니다. 그 소망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복스러운 소망,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입니다.
데살로니가서에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살전 4:13) 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망 없는 다른 이”라는 말은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런 것을 보면 성경은 세상 사람들이 미처 생각하지 않던 문제를 참 많이 이야기합니다.
오직 한 권의 책, 성경
사람이 이 세상에 사는 데는 의식주도 필요하고 돈이나 명예, 좋은 직장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내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 세상에 살면서 평생 함께 지내야 될 것이 하나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요즘 학생들에게 “너와 가장 친하고 가장 가깝게 지내는 것이 무엇이냐?” 라고 물으면 컴퓨터라고 대답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어떤 책이라고 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꼭 필요하고 평생을 같이 지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육체에게는 먹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마신 물이나 먹어서 소화된 음식이 혈액을 보충하고, 그 혈액에 의해서 기존에 있던 세포가 사라지며 새로운 세포로 교환됩니다. 음식은 그렇게 우리 몸을 지탱합니다.
그런데 우리 영혼에게 꼭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성경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평생에 듣던 말씀 또 들려주시오” (찬송가 236장) 하는 찬송가를 부르곤 하는데, 그것은 성경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설교자가 재미있는 예화나 우스운 이야기를 섞어 하는 설교가 “평생에 듣던 말씀” 속에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평생에 듣는 말씀은 성경뿐입니다. 죽음이 나에게 거북스러운 문제가 아니라면, 그 죽음 앞에서도 소망과 희망이 있다면, ‘죽음은 나를 사랑하는 분에게 옮겨주는 매개체’ 라고 생각한다면 이 성경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알 것입니다.
어떤 한 유명한 사람이 병중에 누워서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자기 옆으로 가까이 온 사위에게 책을 가져다 달라는 말을 했습니다. 사위가 “서재에 많은 책들이 있는데 어떤 책을 말씀하십니까?” 물으니 “책은 오로지 성경 한 권밖에 없네.” 하고 대답했다는 이야기를 어느 책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또 이런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이 지구의 역사 이래 어떤 베스트셀러 책도 성경을 앞지른 것은 없다고 합니다. 한 권의 책으로서 가장 많이 인쇄된 것도, 가장 많이 팔린 것도 성경책입니다. 또 세상의 어떤 책보다 성경을 가장 많이 논합니다.
성경이 인간에게 주어진 이래 이 지구의 역사는 많이 바뀌어 왔습니다. ‘성경이 없었다면 지금 세상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어릴 때 이 성경에 대해 불렀던 찬송가가 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 해어졌으나어머님의 무릎 위에 앉아서 ...재미있게 듣던 말 이 책 중에 있으니이 성경 심히 사랑합니다 (찬송가 234장)
대단한 어머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녀를 무릎에 앉히고 자기가 사랑하는 성경책을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어머니라면, 아이는 자라서 그 어머니를 존경할 것입니다. 평생 어느 때든지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찬송가 468장) 하는 그 찬송 가사처럼, 목소리를 다듬지 않고 준비하지 않더라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자연스러운 흥겨움이 찬송으로 흘러나온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 마음에 있는 찬송이 자유롭게 흐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는 찬송도 좋지만 내가 내 영혼에게 들려주는 찬송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옛날에 미국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주정뱅이들이 모여서 술을 마시며 즐기다가, 한 친구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 실컷 마셨으니, 2차로 자네 집에 가는 것은 어떨까.”
“좋지.”
그 집에는 집주인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종교인이 있었는데, 바로 자기 아내였습니다. 아내는 예수를 믿는데 이 사람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그렇게 못마땅했나 봅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골탕 좀 먹이자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미국 사회에서는 다른 사람의 집에 놀러가면서 그의 아내에게 양해를 얻지 않는 것은 결례인데, 한밤중에 친구들을 데리고 밀어 닥쳤습니다. 그런데 주정뱅이들이 집에 들어가면서 안주인의 얼굴을 보니 예상했던 표정이 아니었습니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남편이 요구를 합니다. 친한 벗들이 왔으니 술도 마시고 음식도 먹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 남편과 친구들은 소파에 앉아 졸기도 하며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편으로 이들은 안주인에게서 짜증스러운 소리가 나리라 짐작하고, 조금은 너무 무례했던 것이 아닌가 싶어 미안한 마음으로 기다렸는데, 그때 부엌 쪽에서 찬송 소리가 났습니다. “내 주의 지신 십자가 우리는 안 질까” (찬송가 365장) 하는 찬송을 아내가 조용히 부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조금 후에 안주인은 음식을 차려 내왔습니다. 그러자 남편의 친구들이 미안해하며 “짜증스럽지 않습니까? 기분 안 나쁘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안주인은 괜찮다며 찾아 온 사람들을 오히려 자연스러운 표현으로 위로했습니다. “세상에서 얼마나 의지할 것 없고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하면 술로 세월을 보내십니까.” 하고 조용하게 말했습니다. 이 안주인의 소리 속에는 어떤 중요한 교훈이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비록 가정주부에 불과한 사람이었지만 그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그 소리를 들은 많은 사람들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와 반대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백여 년 전 미국에서의 일입니다. 유명한 판사의 아내가 있었는데 교회에서 인정을 받는 사람이었던가 봅니다. 그 부인이 당대 유명한 설교자인 D.L. 무디라는 사람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아무래도 제 남편은 구원받기 힘든 사람 같습니다. 마귀 같아요.”
아마 걱정이 되어서 했던 말이겠지요. 그런데 그 설교자는 뜻밖의 대답을 했습니다.
“당신 남편이 마귀가 아니고, 당신 남편 앞에 서면 당신이 마귀일지 모릅니다.”
이 말을 들은 부인은 화가 나서 남편에게 가서 자존심 상했던 그 일에 대해 말했습니다. “당신 아내가 이렇게 괄시를 받았는데 그 사람을 그냥 두시겠어요?” 하니, 남편은 무디라는 사람이 무슨 말을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자신에게 마귀라고 했다고 대답했더니 남편이 말합니다.
“맞아, 마귀 맞아. 그 사람 참 매력적인 사람이네. 한번 만나보고 싶군.”
그리고 무디를 찾아 간 남편은 성경 이야기를 듣고 확실히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어떤 책에서 이 이야기를 보고 ‘야, 재미있는 일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 여인 중 한 사람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짜증내지 않고 찬송으로 자신을 표현했고, 다른 한 사람은 즉시 짜증을 냈습니다. 그런데 두 경우 모두 어떻게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었습니다.
저는 성경 때문에 변화 받은 사람들이 세상에 상당히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지금도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평생 먹는 음식보다 성경을 더 가까이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삶은 진짜 자랑스러운 삶일 것입니다. 음식을 멀리하면 죽음이 가까이 다가섭니다. 밥을 먹지 않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까? 문제는 내 평생에 하나님 말씀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성경을 얼마나 읽고 살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생활 속에서 내가 즐겨 읽은 책들보다 이 성경이 더 나은가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또 내가 좋아하는 TV 프로그램과도, 세상에서 내가 좋아하는 어떤 것들과 성경을 비교해 보십시오. 어떤 것이 내게 더 가깝습니까? ‘그래도 성경이 제일이다.’ 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랑스러운 영혼의 삶일 것입니다.
이 성경을 종교 생활의 액세서리 정도로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또 일요일이 되면 으레 들고 다니는 책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큰일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 강연을 들으면서 페이지의 한쪽 귀퉁이를 접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참 후에 보면 얼마나 성경을 읽지 않았는지 그 종이가 그대로 꺾여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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