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회 국내·외 성경탐구모임 2006년 8월 2일 오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한 성경
오늘 아침, 저는 창세기 15장부터 17장까지와 신약 성경의 말씀들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이리저리 넘겨보면서 하나님께서 쓰신 이 원고가 참 치밀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인물 개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당시에 일어난 사건들은 상당히 심각한 것들이었고, 신앙에 관해 직면한 문제이자 현실적인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그 인물들은 자신이 원했든지 원하지 않았든지간에 하나님께서 사용하고자 하신 대로 쓰였습니다. 각 인물들이 살아오는 동안 겪은 경험들이나 성격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합당하게 동원되었습니다. 사도 바울 같은 분들을 생각해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성경의 장대한 줄거리와 그 속에 동원된 많은 인물들이 과연 누구 때문에 존재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에스더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목에 에스더의 이름이 있기 때문에 이 성경의 주인공이 에스더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에스더도 주인공입니다. 그런데 저는 에스더의 사촌 오빠인 모르드개가 이 내용에서 빠진다면 어떻게 될까, 모르드개가 없는 에스더서는 우리에게 어떻게 읽히고 어떻게 보일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구약의 많은 말씀들과 많은 인물들을 대하면서 그런 생각을 가져 보는 것은 내용을 이해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에 대해서 배우고, 유다와 그 형제, 요셉, 모세 등 수많은 인물들에 대해서 배우고 알아가지만, 정작 예수라는 분을 이 성경에서 발견하지 못하고 이야기로만 끝나 버린다면 성경을 대하는 그 시간들이 얼마나 아까운가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에스더서에는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이라는 말도 없고, ‘신’이라는 말도 없습니다. 그저 한 민족에게 있었던 하나의 큰 사건 정도로 우리에게 비추어지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들이 예수님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신약 성경이 아직 기록되지 않았을 때,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요한복음 5:39)
신약 성경을 읽다 보면 “성경에 일렀으되”, “경에 기록한” 하는 구절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시대를 기준으로 해서 보면, 신약 성경에서 말하는 ‘성경’은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구약 성경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지금 유대교에서도 인정하고 있는 구약 성경에는 예수라는 이름이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는 정도로만 나왔을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자신 있게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요 5:39)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특정한 구절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다.’ 라는 정도라면 참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 7:14)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사야 9:6)
구약 성경에 있는 이러한 구절들에 예수님을 맞추기는 쉽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입니다. 참 어려운 말입니다. 어떻게 이 성경 전체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고 하셨을까.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요한복음 5:45-47)
흔히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 다섯 권을 모세 오경이라고 부릅니다. 모세가 기록한 모세오경 속에도 예수에 대한 증거, 예수의 이야기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지자들의 글 속에도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특히 한국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닌 분들은 시험공부를 하던 버릇이 있습니다. 공부할 때, 선생님들이 “요것 밑줄 그어 놔라, 시험에 나온다.” 라고 하시면 밑줄을 긋고 그 내용들을 다 외우는 것입니다. 또 따로 적어서 시험 치기 바로 직전에 외웁니다. 조금 못된 사람들은 그것만 적어서 커닝 페이퍼를 만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공부하던 방법으로 성경을 보면, 성경에 있는 구절들 중에 어떤 것은 귀해 보이고 어떤 것은 천해 보입니다.
성경에는 희한한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한 여자가 있었는데 행음한 뒤 남편을 버려두고 자기 아버지 집에 돌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남편이 그 여자를 찾아가서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이 여자는 동네 남자들에게 밤새도록 강간을 당합니다. 그리고 남편은 그 여자의 시체를 열두 조각을 내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게 뿌려버렸습니다. 사사기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19장 참조) 그런 내용을 보면 도대체 예수를 증거하는 이야기가 어떻게 이렇게 흉측할 수 있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일어난 사건들, 특히 이스라엘 역사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훗날 예수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일어날 일들로 인해서 발생될 문제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사기의 이런 말씀처럼 행음하는 문제나 열두 지파에게 경고하는 이야기들은 개인적으로만 받아들일 것이 아닙니다. 이런 말씀을 읽고 개인적으로 ‘바람피우지 말아야겠다.’, ‘간음 죄 짓지 말아야겠다.’ 라고 생각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율법서 속에 있는, 이러이러한 것을 하지 말라, 이러이러한 것은 하면 죽는다 하는 많은 이야기들은 인간의 잣대에서 기록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잣대에 의해서 기록된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기준에서 기록되어, 인간이 하나님께 도전하면서 짓는 죄나 무지한 중에 지을 수 있는 죄에 대해 경고하는데, 그 많은 죄들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비추어진다는 것입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21, 27) 하는 말씀들을 보면서 ‘아,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그 의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내 노력 외에 다른 한 의가 분명히 있어야 되는구나.’ 하는 사실을 알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 구약 성경입니다. 그것을 일컬어 옛 언약이라고 합니다.
또 성경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간음하는 여인처럼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돌아서서 이방신을 섬기고 우상을 섬겼을 때, 그들에게 일어나는 엄청난 재앙과 사건들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 개개인이 그것을 들여다보며 내가 죄인으로 태어나서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내 나름대로의 신앙으로, 내 나름대로의 종교를 가지고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섬기며 살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길잡이 노릇을 해주는 것이 바로 이 성경이요,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그런 것을 알게 될 때, 또 그러한 문제를 해결해 나가고자 할 때,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이 아닌 신약에 나타나는 인물입니다. 성경은 세상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듯이, 신약의 어느 한 구절 읽고는 그것으로 제사를 다 지낸 것처럼 좋아하고 찬송하는 것을 요구하는 책이 아닙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구약에 나타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를 통해서, 또 예수를 중심으로 한 많은 예언적 사건들과 많은 비유적인 이야기들, 그리고 그 이야기들에 등장하는 엄청나게 많은 인물들을 통해서 구약의 기준에서는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는 오신 그리스도를 발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를 보며 구약의 많은 예언의 내용들을 되돌아보았을 때, ‘아, 이렇기 때문에 오셨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한탄하는 목소리를 내시고, 선지자들을 통해 성경을 기록하신 하나님께서 “네가 어디 있느냐” (창 3:9) 하고 아담을 찾으신 것과 같이 죄인을 찾아 나서신 목소리를 구약에서 발견하고, 그 모든 요구를 이루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감사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구약과 신약의 관계입니다. 어느 하나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구약 성경을 조금 재미있게 보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야기들은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삼손 이야기는 영화로도 만들어졌을 정도로 흥미진진합니다. 그런데 에스겔서 같은 책은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선지자가 그발 강가에 있는데 ‘저 위에서 어떤 형상이 하나 나타나는데, 바퀴가 네 개가 달려 있고, 그 앞에는 얼굴들이 하나씩 달려 있고, 그 위에는 궁창의 모습이 있고, 그 위에는 사람의 모습 같은 것이 있는데 위로는 단 쇠 같고 밑으로도 무지개가 그 허리를 둘렀고’ 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겔 1장 참조) 또 계속 읽다 보면 이야기들이 한참 흘러가다가 삼천포로 빠지는 것같이 다른 이야기가 나오기도 합니다.
또 구약의 말씀은 참 길기도 합니다. 천 몇 백 페이지나 되는데, 책은 서른아홉 권에다가 저자도 삼십 명 가까이 됩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써놓은 책들을 읽어가자면 엄청난 인내심이 요구됩니다. 구약 성경은 길고, 읽기도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예수께서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하신 그 말씀을 기억하고, “입이 식물의 맛을 변별함같이” (욥 34:3)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해서 이 성경을 읽어나가면 구약 성경이 신약보다 사실은 훨씬 재미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처음부터 우리에게 말하여 온 자, 예수 그리스도
그런데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쓴 편지 속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에베소서 2:19-20)
에베소서는 에베소에 살고 있는 이방인으로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 유대인인 사도 바울이 보낸 편지입니다. 이 내용은 이방인을 향해서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맡은 사도 바울이 쓴 편지 속에 있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움을 입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교회, 역사적으로 오순절 이후에 거듭난 영혼들 전체가 포함되는 이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움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신약과 구약의 말씀들 위에 세워진 교회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마 16:18) 라고 하셨습니다. ‘이 반석’은 베드로가 아니라 예수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 1: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14)
요한복음 8장 25절에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저희가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이 말씀을 영어로도 한번 보겠습니다. 뉴킹제임스 버전입니다.
Then they said to Him, “Who are You?” And Jesus said to them, “Just what I have been saying to you from the beginning.”
한국어에는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 라고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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