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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 모두가 죄인이다

제31회 국내·외 성경탐구모임 1999년 7월 26일 저녁       하나님의 판단과 심판     로마서의 내용은 세 종류의 사람에게 설명되고 있습니다. 로마서는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해진 편지인데, 그들 중에는 로마 사람도 있었지만 유대인들도 있었습니다. 또 그 유대인들 중에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무언가가 아직 확실하지 않은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로마서 1:15)       이 말씀을 보면 로마서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만을 대상으로 기록된 편지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로마서는 로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쓴 편지이지만, (롬 1:7 참조)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한노라” 고 한 것은 믿는 사람도 많지만 그들 중에 무언가가 확실치 않은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복음 전하기를 원한다는 원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 로마서는, 성경을 읽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며 살아가지만 무언가 아직 해결하지 못한, 영혼이 어떤 비늘 같은 것에 가려져 있는, 그래서 그것을 씻어야 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기록된 편지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에는 하나님의 보시기에 미움 받을, 하나님의 심판 규정에 놓인 사람들의 본성과 성격에 대해서 설명되고 있습니다.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고, 자기 지식으로 하나님께 도전했고, 하나님을 가까이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멸시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상실한 마음 그대로 버려 두셨다 했습니다.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하고 수군수군하고 비방하고 불효하는, 이러한 많은 죄들을 짓고 사는 사람들이 서로를 옳다고 인정해 주고 인정받는 세상 속에서 자기는 선하다고 생각합니다. (롬 1:28-32 참조)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이 죄 가운데 살면서도 어떤 판단력이 있기 때문에, 즉 타인을 정확하게 보고 판단하는 정신적인 능력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판단하며 살아가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나 판단 받으며 사는 사람이나 똑같이 죄인으로 취급하신다는 것이 로마서 2장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2장 1절에,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라고 한 것입니다.     2장 1절부터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누구든지 핑계치 못할 죄에 놓여있는데, 남을 판단하는 그 판단력이 너 스스로를 정죄하고 있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똑같은 사람들끼리 자기 기준으로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느냐, 그러는 너는 어떠하냐 하는 말입니다. 판단하는 ‘너’도 죄인이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을 지적해 주셨습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로마서 2: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라고 하며 다시 설명합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자기 기준이 있는데, 판단하는 너 역시 같은 일을 하기 때문에 네 자신이 너를 정죄한다는 것입니다.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에 대해 자기 스스로를 한번 살펴봐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로마서 1장 27절을 봅시다.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왜 ‘일’이라는 말을 붙였을까? 28절,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도 죄악 된 ‘일’로 규정하셨습니다. 그 다음 32절,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를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그냥 막무가내로 죄를 지었다든지, 나쁜 짓을 했다든지, 더러운 사람이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이 같은 일’을 행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 성경을 보면 느끼는 바가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는 동안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고, 어떻게 시간을 보냈으며, 그렇게 시간을 보낸 결과 무엇이 남았는지, 어떤 일을 행하면서 살았는지에 따라 훗날 우리 영혼은 그 일에 대한 대가를 받게 됩니다.     오래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혼자 은근히 웃은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젊은 남자 의사 한 분을 만났는데 얼마나 얌전하고 점잖은지 걸음걸이도 조용하고 성격도 무척 조용하고, 조용히 말하는 분이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저런 사람이 어떻게 의사가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의사라면 해부학도 공부하고, 가차 없이 남을 찔러 주사를 놓기도 했을 텐데, 그 사람의 기질이 아주 얌전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실례지만 선생님은 어떤 운동을 하십니까? 하루에 운동하는 시간이 얼마나 됩니까?”     “저는 숨 쉬는 운동밖에 안 합니다.”     그 말에 저는 그 어떤 말도 덧붙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는 그 사람이 자기 기질에 꼭 맞는 대답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니 숨 쉬는 운동은 보통 운동이 아니었습니다. 그 운동이 없다면 사람은 죽습니다. 죽은 사람의 팔다리를 아무리 움직여 본들 그것이 죽은 이에게 운동이 되겠습니까. 허파에서 산소를 받아들이고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고, 혈액 순환이 잘 되게 심장이 펌프질을 해야 사람이 살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그 의사의 대답은 순진하고 간단한 것이었지만, 실제 인간의 몸은 인간이 만드는 어떤 로봇보다 훨씬 더 강한 힘을 창조자로부터 물려받았다는 것을 생각할 때, 참 멋진 대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한번씩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사람이 숨을 쉬며 살아가는 동안 해 놓은 일들 중 결국엔 무엇이 남을까 하는 것입니다. 세월이 흐르면 언젠가는 모두 끝나는 일인데 말입니다. 사람들이 세상을 살면서 남을 비판하고 판단하는 일을 행했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로마서 2:3)       사람마다 똑같은 일을 저지르고 있는데, 그 일이라는 것은 죄악에 싸잡힌 것이라고 성경은 지적합니다. 비판을 하는 사람이나 비판을 받는 사람이나, 판단하는 사람이나 판단을 받는 사람이나 똑같은 일을 행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 어느 날 마지막 대심판 때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판단이 있습니다. 그때는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판단자 앞에 자신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세상에 살면서 스스로 마음에 결정하고 각오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로마서 2:4)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죄인을 인도해서 회개하게 하시는 그 일을 알지 못하여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을 멸시하느냐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오래 참고 기다리시고 우리를 폭넓게 포용하시고 용서해 주신 그 일을 멸시하느냐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로마서 2:5)       인간의 책임이 여기에 있습니다. “네 고집과”, 이 고집 속에는 인간의 자존심도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그 알량한 자존심이 하나의 고집으로만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 자존심을 세우느라고 인간에게 회개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마음이 없다는 말은 뉘우치고 돌아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여기 기록된 ‘회개’를 잘못 생각하여, 자백하는 것을 회개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통회자복(痛悔雌伏)한다 해서 산기도를 간다든지 새벽기도 하러 간다든지, 혹은 어떤 부흥회에 가서 울고불고 소리 지르면서 ‘이제 용서해 주시옵고 어쩌고 저쩌고’ 하며 계속 무언가 토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는 마음의 변화는 조금도 없으면서 소리로만 회개하고 뉘우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만 옳다고 하고 자기 고집대로 살고 자기 판단대로 살고 자기 자존심대로 살았던 고집쟁이가 종교적인 사고와 행동은 익숙하지 않아 잘 행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마음 깊숙이 한 구석에서 ‘이래서는 안 될 텐데....’ 하며 돌아서는 뉘우침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은 회개하지 않는 그 마음이 진노의 날, 하나님의 심판 날에 자신에게 임할 형벌을 쌓고 있습니다.     종교에 귀의한 사람들은 종교적인 사고로 자신을 자책하고, 자아를 정돈하며 깨끗하게 되려고 노력하는데, 이 성경에서 요구하는 회개는 폐일언하고 자신을 바꿔가며 ‘내가 하나님께 굴복해야겠구나.’ 하는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훗날 이러한 찬송이 우러나올 것입니다.       한 번 주께 굴복한 후 성신 주장하시고  (합동찬송가 430장)       자기 입으로 자신이 지은 오만 가지 죄를 다 말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자기 자신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직접 하신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집에 아들이 둘 있었습니다.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만 둘째 아들이 머리가 좀 비상했나 봅니다. 아버지의 재산이 많은데, 가만히 세월 보내다가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재산을 물려주지도 않고 돌아가시면 큰일 나겠다 싶고, 또 아버지께서 오래 사신다 해도 그 재산은 다 형님 차지가 될 텐데, 이럴 바에야 아버지가 건강하실 때에 자기 몫을 챙기자는 생각에 아버지에게 간곡히 부탁해서 많은 재산을 미리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아버지도 형님도 없는 다른 나라에 가서 참 즐겁게 살았나 봅니다. 그렇게 하고 싶은 것 다 하며 살다 보니 돈도 다 떨어지고, 흉년까지 들어 남의 집에서 돼지 치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로라도 배를 채우려고 했는데 그것조차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주인 눈치 봐야지 돼지 눈치 봐야지, 이 불쌍한 헛똑똑이는 어느 날부터 마음에 괴로움이 시작되었습니다. 먼 하늘을 쳐다보니 아버지와 형님의 얼굴이 떠오르고 떠나온 고향이 그리워졌습니다. 그래서 ‘아이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 아버지 집에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하면서 한탄하다가, 이 젊은이는 ‘아버지 집에 가서 품꾼의 하나라도 써 달라고 부탁해야지. 거기에는 먹을 것도 많은데.’ 하고 마음을 돌이켰습니다. 그동안의 자기 생애를 바꾸어 이제는 자기 아버지 집으로 찾아들어갑니다.     그때 아버지는 계산 없는 마음으로, 아들의 목숨을 안타까워하며 ‘지금쯤 올까. 멀리 떠난 내 아들이 왜 안 돌아오나.’ 하고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뜻밖에 멀리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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