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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 입이 식물의 맛을 변별함같이 귀가 말을 분별하나니

제38회 국내·외 성경탐구모임 2006년 7월 31일       입이 식물의 맛을 변별함같이     이번 성경탐구모임의 주제 성구는 조금 특이합니다. 저는 이 구절이 주제 성구로 정해졌다는 이야기를 두어 달 전에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읽어보니 아주 쉬운 말인데도 무슨 말인지 잘 알 수 없었습니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참 이상한 말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구절이 욥기 12장에도 나타납니다. 욥이 괴로운 상태에서 “입이 식물의 맛을 변별함같이 귀가 말을 분변하지 아니하느냐” (11절) 하는 말을 했는데, 이제는 엘리후라는 사람이 다시 한번 이 이야기를 합니다.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입이 식물의 맛을 변별함같이 귀가 말을 분별하나니 우리가 스스로 옳은 것은 택하고 무엇이 선한가 우리끼리 알아보자 (욥기 34:3-4)       이제는 영어로 읽어보겠습니다.       “For the ear tests words As the palate tastes food. Let us choose justice for ourselves; Let us know among ourselves what is good.”       여기 ‘ear’ 라는 말이 있는데, 발음이 쉽지 않습니다. 올해가 몇 년도냐, 혹은 몇 년 동안 무엇을 했느냐고 영어로 물을 때, 잘못 발음하면 ‘올해는 무슨 귀냐?’ 하는 질문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연도를 나타내는 단어 ‘year[ji  r]’와 귀를 나타내는 단어‘ear[i  r]’는 발음이 조금 다릅니다. 간단한 발음 차이라도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듣기에는 귀에 거슬릴 수 있습니다. 한국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이 아프다’ 할 때의 ‘눈(目)’과 ‘하늘에서 눈이 온다’ 할 때의 ‘눈(雪)’의 뜻 차이를 한국 사람들은 분명히 구분합니다. 그러나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들은 ‘눈’이라고 했을 때, 그것이 하늘에서 내리는 눈인지, 신체의 일부인 눈인지를 잘 구분하지 못할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소리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소리들 중에는 내 귀를 통해, 내 뇌를 통해 내 양심에 전달되는 소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많은 소리들 중에서 그 소리를 구분해서 들어야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이 성경이라는 말씀을 펼쳐놓고 있는 우리들은 지금까지 내가 들었던 것들이 내 영혼을 한 번 자극한 적이 있던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여기 “입이 식물의 맛을 변별함같이” 라는 말이 먼저 있습니다. 우리 입은 어느 정도나 식물의 맛을 변별할 수 있습니까? 생각해 봅시다. 한국인들에게 눈을 감으라고 하고 입에 김치를 하나 물려 주면, 그것이 물김치인지, 총각김치인지, 열무김치인지 구별할 줄 압니다. 음식을 보지 않아도 입에만 넣으면 그 맛으로 어떤 음식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 김치입니까, 금방 담근 김치입니까?’ 라고 물어도 웬만한 한국 사람들은 다 구분합니다. 아주 어린 아이들도 입에 음식을 넣어 주었을 때, 자기가 평소에 먹던 음식이 아니면 뱉어 버립니다. 또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이면 잘 먹습니다. 그렇듯이 인간은 태어나 어머니의 젖을 빨면서부터 맛을 구분하고 변별할 수 있는 엄청난 감지 능력을 혀에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의 혀가 얼마나 예민한지 아십니까? 음식을 입에 넣고 공들여서 잘게 씹다 보면 쌀알 하나만 입에 남아 있어도 그것을 혀로 감지해 낼 수 있습니다. 또 포도주를 감정하는 사람들은 맛만 보아도 그 포도주가 어느 지방에서 만들어진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좀 더 실력 있는 사람들은 그것이 몇 년도에 만들어진 것인지, 얼마나 잘 익은 포도주인지까지도 구분합니다. 포도주 맛을 그렇게 구분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 포도주나 저 포도주나, 포도주가 포도주지.’ 하는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열무김치, 물김치, 총각김치, 깍두기를 구분하듯, 그들은 어느 지방에서 어느 해에 난 것인지, 이런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혀는 그것을 구별하는 데 상당히 발달되어 있습니다. 특히 많은 프랑스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또 독일 사람들은 수천여 가지 맥주의 맛을 구별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읽은 이 말씀은 그냥 쉽게 넘길 구절이 아닙니다. 입이 음식의 맛을 변별함같이 귀가 말을 분별한다는 것, 무엇 무엇처럼 이러하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루도 빠짐없이 음식을 입에 넣고 사는 동안 내 귀에 들리는 음성들이 어떠한 것인가를 우리 개개인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좋은 소리 많이 듣고 살아라.’, ‘좋은 말 많이 하고 살아라.’ 하는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의미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입은 육체의 생명을 보존하는 데 동원됩니다. 물론 말하는 일도 합니다만, 육체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음식을 넣고 씹는 일을 합니다. 또 변별해서 먹지 않기도 하고, 좋다고 여겨지면 많이 먹기도 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일평생을 살아가는 그 방법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하고자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이 욥기는 그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여러분들 한번 눈을 감아보시기 바랍니다. 무엇이 보입니까? 안 보이실 것입니다. 또 손을 대지 않고 코를 한번 막아 보시기 바랍니다. 냄새를 맡을 수 없을 것입니다. 먹기 싫으면 입을 다물고 음식을 먹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소리를 듣기 싫다고 귀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눈 감고, 코 막고, 입은 다물 수 있지만 귀에 문제가 있지 않는 한 귀는 막을 수 없습니다. 우리 신체의 많은 부분 중에 이 귀라고 하는 것은 아주 특이합니다. 내가 듣고 싶다고 듣고, 듣기 싫다고 듣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손으로 귀를 막는다거나 소리를 차단해서 듣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내 귀청에 들리는 소리는 귀에 이상이 없는 한 반드시 받아들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이 귀라는 것을 주셨을까요? 왜 하필이면 한참 말다툼하고 있는 욥과 그 친구 세 사람에게 엘리후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이런 이야기를 했을까요? 현시대에 성경을 가지고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이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로마서 10:17)       이 구절을 보고 여러분들 중에는 ‘그러면 귀머거리들은 어떻게 하나?’ 하는 궁금증을 가지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구원받지도 못한다는 말일까. 성경에 ‘귀를 통해서 듣는다’고 하는 것에는 눈을 통해서 말씀을 보는 것까지 포함하는 때가 많습니다. 정상적인 육체를 가진 사람들에게, 원래 의도하신 그 육체를 가진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귀가 말을 분별한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다른 기관을 통한 것은 다 막을 수 있어도, 귀에 들리는 소리까지 막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절대로 핑계 댈 수 없도록 지어진 것이 사람입니다.     우리는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하는 이 말씀에서, ‘들음’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물론 성경 말씀이나 어떤 강연이 귀에 들리는 차원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들음’이라는 것은 귀를 통해서, 귀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라면 눈을 통해서, 아니면 수화로라도 이것이 우리 신경을 통해서 전달되어서 내 양심 속에 한 번 들렸느냐 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들음’이 귀로써만 듣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목격했습니다. 어떤 젊은이에게 전도하면서 제 스스로 목격했고, 경험했습니다. 멕시코의 한 시골 동네에서 전도를 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한 젊은 청년이 왔는데 그 청년은 어려서부터 말을 못하고, 소리도 듣지 못했습니다.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청년이 가족들과 함께 집회에 참석한 것입니다. 냄새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그런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래서 몇 분과 의논하다가, 제가 칠판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있는 모습과, 그 청년의 얼굴을 그렸습니다. 그 앞에서 그의 어머니와 동생은 죄에 대한 연극을 했습니다. 그 사람이 마음속에 가졌던, 사람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죽이고 싶어했던 마음에 대해서 그 가족이 얼굴도 찌푸리고 손짓도 하면서 표현했습니다. 그 죄 때문에 지옥에 간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끄덕끄덕 아는 체를 합니다. 그리고 그에게 예수의 그림을 보여 주면서,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죄가 사해졌고 당신 자신은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자 어느 순간, 그 사람의 얼굴이 확 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확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믿음이 어떻게 생긴 것입니까? 들음에서 났습니까, 봄에서 났습니까? 분명히 봄으로써 믿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들음에서 난다는 이 성경 구절이 틀렸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 말씀을 읽지만 듣기도 합니다. 그리고 듣는 과정 속에서 자기 영혼의 문제가 정리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멕시코 청년처럼 듣지 못하는 사람이 어떤 설명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했을 때 그 양심 속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목소리를 들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길이 그 양심에 분명히 닿았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바꿔 놓은 소리 한 마디     제 자신도 그랬습니다. 저도 이 성경 말씀, 특히 복음에 대한 말씀은 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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