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강해 중에서 2005년 12월 17일
영원한 기쁨
빌립보서를 읽다 보면, 눈에 띄는 몇몇 단어가 있습니다. 그중에 ‘기뻐한다’는 단어가 있는데, 사람들이 흔하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이 기쁨은 어떤 것입니까?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어떤 것을 기뻐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세상 사람들은 어떤 중요한 행사나 잔치 같은 때에 기뻐하고, 재미있는 영화를 보고 기뻐하는가 하면, 음악회에 가서 기뻐하고, 시험에 합격되었기 때문에 기뻐하는 등 여러 상황에서 기뻐합니다. 하나하나 다 말할 수는 없지만, 인간 세상에서는 기쁨이라는 것이 빠질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명예를 쟁취했거나 학위를 받았거나 복권에 당첨되면 굉장히 기뻐합니다. 그런데 복권에 당첨된 사람 중에는 혹 누군가에게 당첨금을 뺏길까 하는 걱정에 직장도 다 그만 두고 외국으로 가 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복권이 당첨된 후에 서로 자기 것이라고 싸우다가 둘도 없이 친하던 친구와 원수가 되어 버리기도 합니다. 이렇게 기쁨이라는 것 뒤에 엉뚱한 것이, 기쁨 아닌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는 수도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기쁨’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기쁨은 인간 역사 속에 계속 존재해 왔습니다. 그런데 신약 성경 빌립보서는 이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고 즐거워하는 그런 기쁨과는 거리가 먼, 전혀 다른 기쁨을 말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에 표현된 기쁨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기쁨과는 완전히 구별됩니다. 물론 다른 성경에도 기쁨에 대해서 많이 표현되어 있지만, 유독 빌립보서에서는 짧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장마다 기쁨에 대한 내용이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주일을 생각해 봅시다. 지난 한 주, 혹은 지난 한 달, 아니면 지난 일 년 동안 여러분은 어떤 기쁨으로 살아왔습니까? ‘남들이 사니까 나도 그냥 살아간다.’ 이런 마음입니까, 아니면 기쁨을 찾으려 하니 ‘어떤 조건이 있어야 기쁘지.’ 하는 생각이 듭니까? 빌립보서를 읽어보면, 기뻐해야 할 필요가 없는데도 기뻐하고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가장 어려운 중에 기뻐하고 있습니다. 기쁨의 조건이 하나도 없는데도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가 아닙니까?
이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라는 사람이 내용을 지어내서 마구잡이로 쓴 편지가 아닙니다. 빌립보라는 지방의 믿는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를 믿게 된 동기, 즉 하나님의 복음을 알게 된 동기는 세상적으로 볼 때는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바울과 실라, 이 두 사람은 감옥에 갇혔는데도 찬송을 부르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감옥에 가면 낙담하고 침울해 하는데, 이들은 감옥에 앉아 기뻐하고 있었다니 납득이 잘 가지 않는 상황입니다. 그럴 때에 갑자기 감옥 터가 움직였습니다. 아마 지진이 났나 봅니다. 땅이 흔들리고 옥문들이 열렸습니다. 이런 이상한 현상 때문에 잠을 자고 있던 간수가 놀라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옥 안에 여럿을 가두어 놓았는데, 그들이 다 탈출한 것 같아 겁이 난 것입니다. 당시에는 죄수를 놓치면 지키던 간수가 사형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그 간수는 사형을 당하기 전에 스스로, 자기가 차고 있던 칼을 벽에 꽂아 놓고 거기 엎드러져 자살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사도 바울이 간수를 말렸습니다. 네 몸을 상하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다 여기 있다.” 도망치지 않았다고 그를 안심시켰습니다. 그때 이 간수에게는 ‘내가 어찌할꼬’ 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때 일어났던 옥 터의 흔들림과 이상한 현상은 그에게 굉장히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무슨 구원인지는 모르겠지만, 간수는 구원에 대한 질문을 했습니다. 그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행 16:31) 는 유명한 말이 나왔습니다. 이 간수는 너무 당황해서 ‘어찌할꼬’ 했는데 그러한 대답을 들었기 때문에, 바울와 실라를 자기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아마 감옥에 있는 사택이나 관사였을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그곳에서 간수의 온 가족에게 주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 가족이 다 예수를 믿고 침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과 실라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갑자기 많이 생기니까 그때서야 비로소 기뻐했습니까? 아니면 그 전에 기뻐할 수 없는 조건에서 기뻐했습니까?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가서 맞고, 발에는 쇠고랑을 차게 되었는데도 그들은 무엇이 그렇게 기뻤을까요? 이 기쁨은 세상의 어떠한 법칙이나 조건에도 맞지 않는 기쁨이었습니다. 그 기쁨이 사람들을 당황하게 했고, “어찌할꼬” 하는 부르짖음이 있게 했고, 그로 인해 그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뚜렷한 어떤 일이 생긴 것입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세상의 지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방법들이 더러 나옵니다. 성경에는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느 8:10) 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루를 넘기면서 나는 무엇으로 인해 기뻐했는가 한번 생각해 봅시다. 재물이 많아서 기쁩니까? 아니면 자녀가 많아서 기쁩니까? 물론 없는 것보다는 기쁩니다. 그러나 재물이 많고 자녀가 많은 만큼 걱정도 태산 같습니다. 자녀가 있는 사람은 자녀 때문에 걱정이 많습니다. 옛말에 ‘무자식 상팔자’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렇게 일반적으로 기쁨의 원인과 이유 등을 살펴보면 이 세상에 있는 것들로 인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근심도 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당한 일 가운데 기뻐할 수 있는 조건이 전혀 없는 것 같은데도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그 기쁨의 조건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바울은 그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의 눈에는 기쁨의 원인과 기쁨의 근거가 보였습니다. 우리 일상생활에서는 무엇이 나를 기쁘게 합니까?
저는 빌립보서를 읽으면서 ‘야, 우리 기쁨이 아무리 커 봤자 빌립보서를 기록한 이 바울의 기쁨과 비교할 수 있을까? 내가 돈을 태산같이 벌었다 한들 그의 기쁨과 비교가 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울이 말한 기쁨은 믿는 사람 모두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이 기쁨은 이 세상에서 가진 것이 하나도 없어도 기뻐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활용할 줄 모르고 그 기쁨에 대해 소홀히 여김으로써 그것을 약화시켜 버리지는 않았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무엇 때문에 기뻐합니까? 남편이 돈을 잘 벌어서 기뻐합니까? 집에 재산이 많아서 기뻐합니까? 그러한 기쁨을 모두 더하면 그 기쁨이 얼마나 됩니까? 기쁜 일이 많다고 해서 하루 종일 웃고 다니면 미친 사람 취급을
정회원으로 가입하시면 전체기사와 사진(동영상)을 보실수 있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