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멕시코 성경탐구모임 2월 17일 오후
나의 영원한 이름
출애굽기 3장 13절부터 보겠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13-15절)
전에 우리는 14절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하신 말씀에 대해서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나는 스스로 있다, 항상 있다’ 하는 현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또 베드로전서에는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 (1:23) 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욥기에는, 영원에 계신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으며 살고 있는 우리 인생을 보시는 눈이 어떠한가 하는 것이 여러 곳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사야서를 보겠습니다. 57장 15절,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
지존무상하신 하나님, 우리가 느끼는 시간과 공간을 완전히 초월한 상태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자세히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내용이 아주 특이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가 곧 너를 만나러 가겠다.” 하는 것과는 좀 다릅니다. 이 말씀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시는 하나님께서 이 낮고 낮은 땅에 살고 있는 비천한 사람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짧은 구절을 통해서 영원에 거하시는 하나님과 유한한 세상에 살고 있는 겸손한 자의 마음이 연결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는 전에 바리새인과 세리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두 사람 중에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신 자는 누구였습니까?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 앞에 “나를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했던 그 세리였습니다. (눅 18:9-14 참조)
이러한 일은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땅의 일’에 대한 말씀과도 일맥상통합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내가 땅의 일을 네게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요 3:8-12 참조)
우리는 이 ‘현재’라는 시간을 아주 쉽게 생각하고 삽니다. ‘현재’가 무엇입니까? 지금입니까? 그렇다면 지금은 무엇입니까? 지금이 언제입니까? 여러분은 “이것이 현재다.” 하고 꼬집어 지적할 수 있는 시간을 알고 계십니까? 지금 제가 이 말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제 말은 계속 지나가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현재라는 시간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느 시간, 어느 시점을 꼭 집어서 ‘이것이 현재다’ 라는 정의를 내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들의 삶에 대해서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같이 보내는 일평생” (전 6:12) 이라고 표현하고 계십니다. 그렇듯이 우리 인간은 과거와 미래에 얹혀살면서 ‘현재’가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하는 현재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서에서는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한다”고 하는 영원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성경에는 ‘영원하다’ 는 말과 ‘현재’라는 말이 동격으로 되어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은 영원을 모르고 현재를 모르는 어떤 그림자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영원을 가르쳐 주신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이 영원은 우리가 머릿속으로 상상한다든지 마음으로 느끼는 그런 영원이 아닙니다. 성경이 약속하고 있는 이 영원은 언젠가는 우리 눈에 보이게 실질적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영원이라고 하는 시간은 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육체에 이미 적용되었고, 완성되었습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저희가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요한복음 8:56-59)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입니까? 아니면, “내가 있었느니라”입니까?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있느니라’입니다. 이 말씀은 바로 처음부터 이 역사를 경영해 오셨던 그 하나님의 목소리였습니다. 언젠가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하고 말씀하셨던 바로 그 하나님이 여기에서 똑같은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참 이상합니다. 1500여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는데 어떻게 사람의 모습을 쓰고 온 이분의 말이 모세에게 나타났던 하나님의 말씀과 똑같을까요. 구약을 통해서 계속 말씀해 오시던 그 하나님께서 어느 날 여자의 몸속에 태어나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을 때, 시간과 공간을 완전히 초월하신 그 하나님의 눈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아니 우리 인류 전체를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처음 만나 물었습니다.
“어떻게 저를 아시나이까?”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다.” (요 1:48 참조)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만나기 전에 이미 그를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체에 갇혀 있고 시간의 제약을 받고 사는 인생에게 영원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 약속은 우리 영에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육체에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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