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대 l 축소

<2006.04> 시간 속에 존재해 온 두 인격

-2005년 12월 24일     너희는 무엇을 찾으러 왔는가     인간은 이 세상에 왜 왔는지 모릅니다. 부모도 자식이 왜 태어났는지 모릅니다. 조상들도 전부 몰랐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서 세상을 살다가 갑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은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시나니” (욥 34:21)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 (잠 20:24), 또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니” (렘 21:8)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이 두 길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넓은 문, 넓은 길은 위험하다고 미리 경고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마태복음 7:13-14)       인생길은 짧습니다. 사람들은 인생에 대해서 ‘길 가는 나그네’라고 했습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이라는 노래도 부릅니다. 그러나 그러한 개개인의 길 이전에 우리 모두가 살고 있는 이 땅 위의 인류 역사를 논하는 세월, 그 안에 있는 것들을 먼저 살펴봅시다. 영원이라는 것을 두고 세월을 봅시다.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찬송가 404장)       영원은 끝이 없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영원에서 잠깐 벗어나 있습니다. ‘시간’에 의해 매여 있습니다. 시간 속에 태어난 인간은 죽으면 영원으로 돌아갑니다. 영원히 진행되는 어떤 과정 속에서 잠깐 인간을 이탈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이탈한 곳에서 태어난 인간은 자기 시간을 채우고 다시 돌아갑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살다가 가고, 가고 또 갑니다. 그러나 세월은 계속 이어집니다. 우리도 그 세월 속에서 태어났습니다. 찬송가 가사 중에도 ‘영원’의 의미를 말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길이 길이 나를 사랑하리니  (찬송가 88장)       또 이런 내용의 찬송가도 있습니다. 거기 무궁한 세월이 흘러갈 때  (찬송가 232장)       ‘무궁한 세월’을 세상의 세월에 붙이느냐 영원에 붙이느냐가 문제인데,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천지창조부터 시작되어 언젠가 낡아빠지게 될 인간 역사 속에서 이렇게 짧은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개미가 땅에 기어 다니는 것을 보면 사람은 그 길의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개미는 그것도 모르고 부지런히 갑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게 살아갑니다.     사람은 인생의 어느 시점에 와서는 많은 것을 묻고 찾습니다. 인간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궁금해 합니다. 많은 공부를 한 사람들, 혹은 재산가들이 찾다가 발표한 것이 있습니다. 네안데르탈인, 북경인류, 자바인류 등을 공부해서 학위를 받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그런 설들이 틀린 것으로 판명되고 새로운 학설이 등장합니다. 이제 인류의 기원이 에티오피아로 갑니다. 그곳에서 오래된 해골들을 주워 연구하더니, 그 다음에는 아프리카 남쪽으로 더 내려갑니다. 자꾸만 인류의 기원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또 의존할 데가 없으면 원숭이 쪽으로 관심을 돌립니다. 그러지 말고, 제발 성경 쪽으로 돌리면 좋겠습니다.     만약 저에게 글재주가 있으면 이런 글을 쓸 것입니다.     어느 날 피아노가 세 개의 다리로 걸어가다가 오르간을 만나서 “너는 어디서 났어?” 하고 묻습니다.     “저절로 태어났어.”     오르간의 말에 피아노는 화가 난 듯 소리칩니다.     “야, 저절로라니? 말도 안돼.”     ‘저절로’라는 말은 붙일 수 없습니다. 이 지구에 있는 어떤 것에도 ‘저절로’라는 말을 붙일 수는 없습니다. 욥기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번뇌케 하는 안위자로구나  (16:2)       욥이 한 말입니다. 욥은 아무리 많이 배우고 들어도 남는 것은 혼돈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이 세상에 무엇 하러 왔습니까? 수많은 사람이 던지는 의문이지만, 이 세상에 무엇을 하려고 태어났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렸을 때 교회학교에서 어떤 연극에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저는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찾으러 왔는가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평생돈도 명예도 모두가 싫더라       초등학교 5학년 때 부른 노래인데, 그때부터 사람은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모든 인생은 그런 의문을 갖고 있으면서도 해결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인지, 관심이 없는 것인지 그냥 덧없이 살다 죽습니다.     세월에 실려가는 인간의 역사를 더듬다 보면, 역사학자들이나 고고학자, 과학자들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과학만능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들은 과학이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줄 압니다만, 과학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은 아주 많습니다. 사람들은 얼마나 어리석은지 무엇을 찾다가 지치면 엉뚱한 것에 기대고 그것을 믿어버립니다. 요즘 사람들은 컴퓨터에 지나치게 기대를 겁니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컴퓨터에 너무 의존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아이들 중에는 부모의 눈을 피해서 게임이나 인터넷을 하는 컴퓨터광들이 있습니다. 혹 우리 중에도 정신이 오염된 아이들은 없는지 살펴야 될 것입니다. 여하튼 사람이라면 아이들부터 어른까지 무엇인가에 의존하는 종교 심리가 있습니다. 옛날, 사회 사상 속에 과학과 미신 등 모든 것이 종합되어 있었을 때, 당대 사람들은 나름대로 그것이 인생 철학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과학이라는 것에 마음을 던져 놓고 그쪽으로 끌려갑니다.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     여기서 잠깐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의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제가 어릴 때 참 자주 들었던 찬송가가 있습니다.       우리 구주 나신 날 목자 영광 볼 때에  (찬송가 121장)       저 동방에 별 하나가 이상한 빛을 비추어이 땅 위에 큰 영광이 나타날 징조 보였네노엘 노엘 노엘 노엘 이스라엘 왕이 나셨네  (찬송가 123장)       얼마나 멋있습니까. 이스라엘 왕이 오셨습니다.     이런 찬송가의 내용들이 오랜 세월 제 생각을 많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왜 예루살렘에 찾아왔습니까? 유대 땅 베들레헴에 나신 그리스도를 뵙기 위해서 그들은 베들레헴도 모르고 예수님도 모른 채 다만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분을 찾으러 온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일이 있기 수백 년 전, 동방박사들이 살던 지역의 사람들이 유대 땅을 점령하고는 유대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잡혀간 유대인의 후손 중에는 하닷사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구약 성경 에스더에 나오는 왕후 에스더인데, 그 이름은 ‘별’이라는 뜻입니다. 그 여인이 잡혀간 곳은 오래 전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이 떠나온 갈대아 우르가 있는 나라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나라를 떠나 이스라엘 땅으로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포로로 잡혀온 유대인들은 오래된 전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언젠가 야곱의 별이 떠오를 때 이루어질,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입니다.       내가 그를 보아도 이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정회원으로 가입하시면 전체기사와 사진(동영상)을 보실수 있습니다.

이전화면맨위로

확대 l 축소



* 온라인 쇼핑몰

글소리 PDF 웹북 펼쳐보기


* PC 버전 홈페이지 전환



Copyright (c) 2025 (주)많은물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