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사도행전 3:1-12)
앉은뱅이 같은 인생
예수를 믿는 사람들 중에는 앉은뱅이가 나은 이 기적을 자신에게 비추어 보고 감사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나도 베드로와 같은 기적을 행할 수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는 이런 두 종류의 기독교인들이 있었고, 여러분과 저도 이 둘 중 어느 하나에 속해 있을 것입니다. 이런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바라는 것은 영적인 욕심이겠습니까, 아니면 헛것을 기대하는 것이겠습니까? 세상에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히 13:8) 는 성경 구절을 떠올리며 사도들이 행한 기적을 지금도 행하는 것처럼 떠드는 일부 종교적 잔치에 생각을 빼앗긴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가 설교했던 내용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왜 그가 이 앉은뱅이를 낫게 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복음은 기독교 역사 초기에 먼저 유대인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이때는 아직 이방인에게 복음이 넘어오지 않았을 때입니다. 예수께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 1:8) 고 말씀하시고 승천하신 후 열흘 뒤에 성령이 오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당시 사도들과 믿는 사람들은 오늘날처럼 종교의 틀에 매여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종교의 자유를 부르짖는 상태에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때는 오직 하나의 기독교만 있었습니다. 신교와 구교의 구분이 없었습니다.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던 이 당시, 복음은 순수하게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이스라엘 나라 안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으로 귀화한 사람들이나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 중에 더러 구원받는 사람이 있기는 했지만 아직까지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역사의 행진이 시작되는 이 시점에 이런 앉은뱅이가 나타났습니다. 이 기적이 베드로의 능력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을지, 베드로의 믿음의 결과를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을지 생각해 봅시다. 이 사건을 그저 한 앉은뱅이가 일어선 것으로만 생각한다면 너무 단조롭고 가치가 없는 것 같습니다. 만약 이 내용의 의미가 앉은뱅이의 육체를 일어서게 한 것뿐이라면 이것은 외과 의사가 의술로 병자를 걷게 만드는 것과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이 기적은 앉은뱅이가 원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앉은 채로 평생을 살아온 앉은뱅이가 나아 보려고 몸부림을 치고 안간힘을 써서 일어서게 된 것이 절대 아닙니다. 베드로 역시 그를 앉혀 놓고 열렬하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뜻밖의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로마서에는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9:16 는 말씀이 있습니다. 앉은뱅이는 자신의 병든 몸이 성하게 되어 벌떡 일어설 것을 바라며 부르짖지 않았습니다. 그 일은 앉은뱅이가 전혀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나서 걷고 뛰는 장면 뒤에, 하나님께서 이 사람에게 원하시는 계획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앉은뱅이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예루살렘에 살던 유대인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남다른 무엇이 있었습니다. ‘제구 시’면 오후 세 시입니다. 오후 세 시가 되면 종교적인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눈에 이 앉은뱅이가 어떻게 보였을지는 모르지만, 그는 늘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에는 그의 신상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없고, 단지 그가 성전 미문에 앉아 있었다는 것과 베드로와 요한의 눈에 보였다는 것, 또 누구인지 모르지만 어떤 사람들이 그를 메고 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메고 온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면 이 앉은뱅이에게도 가족이나 지인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앉은뱅이도 바라는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바람은 사지가 멀쩡한 사람들이 바라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평생 살아오면서 한 일이라고는 얻어먹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마음대로 걸어 다니고 활동하는 사람들이 적선해 주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던 이 사람에게도 소년 시절이 있었고 젊은 날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려서는 남들처럼 뛰고 계단도 오르내릴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을 것이고 장성한 후에는 자신을 성전 미문에 메어다 주는 사람들에게 수고를 끼치지 않게 걸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십여 년이라는 긴 세월을 앉아서 보내며 (행 4:22 참조) 그러한 바람도 포기한 상태가 되었을 것입니다. 사십여 년 세월을 앉아서만 보낸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의지하지 않고서는 살아가기 힘든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새로운 학문과 과학의 발달로 몸이 불편한 사람들도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든지 있지만, 당시에 이 앉은뱅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오로지 구걸해서 먹고 사는 것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때 예루살렘에는 유대인의 명절을 지내기 위해 각 나라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각 나라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은 먼 길을 오느라 먼지투성이가 되어 성전 안으로 들어갔을 것이고 이 앉은뱅이는 다른 이들이 성전까지 메어다 주었으니 발에 먼지도 묻지 않았겠지만, 오히려 앉은뱅이는 그 사람들을 부러워했을 것입니다. 또 명절 때마다 이어지는 유대인들의 긴 행렬을 보며 조금이라도 더 수입이 있기를 바라고, 수입이 많으면 마음이 흡족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과거에 없던 새로운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로부터 3년 동안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큰 웅성거림이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이들은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하나님을 찬미하며 지냈습니다. 앉은뱅이는 그러한 잔치 분위기 속에서 혼자서만 외롭게 앉아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누군가에게 돈을 한 푼이라도 더 얻었으면.’ 하는 조그마한 바람밖에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 6:25-26) 하고 말씀하셨는데, 그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어떻게 하면 좀 더 돈을 많이 얻을까.’ 고민하며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명절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은 세계 각지에 전파된 유대교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매우 높고 클 뿐 아니라 아주 아름답게 꾸며 놓은 성전 미문으로는 대단한 인물들, 천하 각지로부터 몰려온 경건한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었습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도 그곳으로 몰려가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그러나 미문에 앉아 있던 이 별 볼일 없는 앉은뱅이에게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곳에 앉아 무언가를 바라고 있었고, 베드로와 요한은 그가 구걸할 때에 그를 보았습니다.
누군가 제게 이때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는다면, ‘얼마 전에 우리 성도들이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 가진 것을 판 돈이 남아 있지 않은가. 그것으로 적선했으면 좋겠다.’라고 대답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인간의 힘을 조금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세상에서 의지할 곳 없는 이 앉은뱅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는 일밖에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를 확실하게 주목했습니다. 두 사람은 무언가를 느꼈습니다.
이 앉은뱅이의 모습을 상상해 봅시다. 이 앉은뱅이는 많은 것을 알면서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걸어 다니는 사람은 움직이기 때문에 어느 한 쪽에서 일어나는 일을 자세히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자리에만 앉아서 하루를 보내는 사람은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누구보다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자기 터로 잡은 성전 미문에서 오랜 세월 동안 구걸한 이 앉은뱅이는 예루살렘의 소식에 대해서 환하게 알았을 것입니다. 아름다운 문 앞, 멋있는 잔치가 연이어 일어나는 곳, 어느 누구도 불행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홀로 불행한 사람, 홀로 외로운 사람. 이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름도 나와 있지 않은, 그저 ‘앉은뱅이’라는 사람입니다.
성경에는 예수께서, 어느 부잣집 대문에 누워서 구걸하던 한 사람을 소개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시라’는 뜻의 나사로입니다. 그가 앉은뱅이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부자에 비해서는 상당히 비참하고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누가복음 16:20-21)
그는 세상에서 비참하게 살다 죽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사로와 이 앉은뱅이의 이야기가 기록된 이유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단지 사람들에게 동정을 요구하거나, 믿는다는 사람들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 이 말씀이 기록되었겠습니까? 이 말씀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
예수께서는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눅 14:13-14) 고 하셨습니다. 온전한 사람보다는 변변찮은 사람들에게 베풀라는 말입니다.
우리 역시 이 앉은뱅이처럼 세상에서 무언가 비참함을 느끼면서 살고 있지 않았습니까? 겉으로는 괜찮아 보여도 속으로는 외로움을 안고 살지 않았습니까? 그런 비참함과 외로움을 스스로 아는 사람이라면 이 앉은뱅이의 마음을 더 잘 알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비천한 사람들
누가복음 1장을 보겠습니다.
엘리사벳이 수태를 못하므로 저희가 무자하고 두 사람의 나이 많더라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제사장의 직무를 하나님 앞에 행할새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고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 주의 사자가 저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니 천사가 일러 가로되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7-13절)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일을 맡았던 제사장 사가랴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괴로움과 외로움 속에 살던 그는 어느 날 하나님께로부터 자신에게 아들이 생긴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사가랴의 아내 엘리사벳은 자식 없는 자신들에게 부끄러움이 있었다는 것을 실토했습니다.
이후에 그 아내 엘리사벳이 수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가로되 주께서 나를 돌아보시는 날에 인간에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 (누가복음 1:24-25)
자식 없이 늙어가는 이 부부의 괴로운 마음은 돈으로도 지위로도 그 무엇으로도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엘리사벳이 잉태하게 된 것입니다. 그 기쁜 일에 대해서 엘리사벳은 “주께서 나를 돌아보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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