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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 어떻게 예수께로 이끌림을 받는가?

요한복음 6장 41-51절 1998. 2. 14. 강연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수군거려 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6:41-51)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요한복음 6장 내용은 읽으면 읽을수록 상당히 깊이가 있는 말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수군거려 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요한복음 6:41-42)       예수께서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말씀하시자 사람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렸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 (눅 3:23) 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아는 사람들과 떨어져 있다가 오랜만에 나타나서, 자기가 알고 있는 어떤 사실을 죽 설명한다고 합시다. 듣는 사람들은 예전에 그들이 상대하던 그 사람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그의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듣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여느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팔십 된 노인이 육십 된 아들을 걱정한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부모는 자식을 어릴 때부터 봐왔기 때문에, 자식이 성장해도 어리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보이는 대로만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속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에서는 우리가 살아온 인적 배경이나 지역 환경, 또는 교육 등에 의해서 정신적인 면이나 마음가짐이 성장하고 있습니다. 사람 속에는 학력이나 지위 같은 외형적인 면과는 다른 많은 것들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다만 밖으로 나타나지 않은 것뿐이지, 우리가 커오는 동안 이미 형성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사람을 평가합니다. 자신들의 속사정조차도 다 모르는 것이 사람들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삼상 16:7) 는 말씀이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고전 2:11) 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의 사정도 아십니다.     요한복음 6장에 나타난 예수님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사야 53장을 읽어 보면, “그는 …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2절)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외형적으로는 별로 대단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 속에는 사람이 감히 평가할 수 없는 인품과 신성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요 14:9)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자기 위치를 버리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아들 예수와 같이 살았던 마을 사람들은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저건 거짓말이야. 저 사람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나사렛 사람 요셉과 마리아가 아닌가. 우리와 한 동네에서 같이 살기까지 했는데. 또 형제도 여럿 있지 않는가. 그런데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다니.’     이렇게 생각할 수 있었겠지요. 또 어떤 사람은 마리아를 데려와서 예수 옆에 세우고, “이 여인이 당신 어머니 아니요?” 하고 따졌을 수도 있겠지요. 이것이 갈릴리 사람들의 공통적인 마음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저 사람은 마리아와 요셉의 아들인데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한다.’ 이렇게 수군수군하는 소리들이 일어났습니다. 예수에 대해서 사람들이 주고받는 이 말들은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는 인간들 사이에서 오가는 말일 뿐이었습니다. 인간이 먹고 사는 동안 생기는 인간사에 있는 말들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뉴스감입니다. 그 자리에 요즘의 신문 기자가 있었으면 분명히 그 수군수군하는 말들을 기사로 썼을 것입니다.     ‘이 예수라는 사람이, 분명히 어디에서 태어나 어떻게 자라났고 부모는 누구인데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한다.’     이 사람들이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보이는 대로 사실을 말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를 미워해서 중상하기 위한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관점에서 정확하고 확실한 말을 했습니다. 그들이 보는 대로, 그들이 판단한 대로 지적했을 뿐입니다. 오히려 사실을 싹 무시하고 ‘그렇더라도 하나님의 아들인가 보다.’ 하고 믿어주는 것이 간사한 것일 수 있습니다.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그러나 예수께서 그 시대에 유대인들을 보는 시각, 유대인들을 보는 생각은 차원이 달랐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사람들과는 다른 차원에서 말씀을 하고 계셨습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사 55:8) 라는 성경 말씀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는 것과 사람의 입장에서 보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하신 이 말씀은 하나님이 기록하신 말씀을 좇은 것이기 때문에, 사람의 생각이나 말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기 변명은 전혀 하지 않으셨습니다. 간단하게 그들에게 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요한복음 6:43)       이 말은 하나님 아들 예수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떡’, 곧 구약 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를 논하는데, 사람들은 논할 가치가 없는 말을 주고받는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수군거림에 종지부를 찍고 그것을 중단시키십니다. 인간의 말을 멈추게 해놓고 하나님의 가르침을 설명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수군거리지 말라’ 한 이때 하나님의 정확한 가르침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지금까지 계속 흘러오고 있습니다. 그 인류 역사 속에 인간이 주고받는 모든 구구한 이야기들도 끝없이 흘러오고 있습니다. 언제부터 인간이 수군거려 왔습니까? 에덴동산 시절에 하와는 벌써 뱀과 속닥거리고 있었습니다. 뱀의 말이 하와 속에 뿌리박힌 것입니다. 하와는 뱀에게 속아 선악과를 먹고 자기 남편에게도 주어 먹게 했습니다. 그 후 인간 역사는 수군수군하는 인간들의 말로써 계속 이어져 왔습니다.     그러한 인간 역사, 즉 인간의 생각과 인간의 마음과 인간의 교육으로 이어지는 이 인간 사회에 어느 날, 하나님 아들 예수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교훈이 시작됩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이끌지 아니하면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요한복음 6:44)       수군거리는 인간들의 말과는 얼마나 대조적인 말씀입니까? ‘아버지께서 내게 이끌지 아니하면 올 자가 없다.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이끄셔서 예수 앞에 온 것입니까? 예수 앞에 왔으니까 이 소리를 듣고 있긴 하겠지만 이것은 그들의 육체만 와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몸만 와 있지 마음이 참으로 예수께 오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 어떻게 사람들을 이끄신다는 말입니까? 성경 말씀을 읽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예수께 오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날 밤,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마 26:38) 하시고,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 26:39)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심한 고통 중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구약에 기록한 모든 말씀이 예수께서 살아 계실 때 낱낱이 모두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다 이루었다” (요 19:30) 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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