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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0> 시작은 미약하나

방초선
      나는 1988년 한국에서 올림픽이 열리고 있을 때 캐나다와 미국을 거쳐 한국에 갔다.     -그 전 1986년에도 한국에 갔었는데, 그때는 한국에 있는 친척을 방문하려는 목적에서였다.- 그 당시 나는 한국 사람들에게 노래를 잘하는 중국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래서 한국에 나올 때마다 한국의 이곳저곳에 초청을 받아 노래를 부르러 다녔다. 여러 교회를 방문하여 중국에 대한 이야기를 하거나 찬송가를 들려주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곤 했다. 그렇게 여러 교회를 다녔고, TV에도 출연해 김동건 아나운서와 인터뷰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1988년 당시는 한국과 중국이 국교를 맺기 전이라 보통 중국 사람의 신분으로 한국에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던 때였는데, 나는 그때 한국에 와서 [11시에 만납시다], [토요객석] 등 TV 방송 프로그램에도 여러 번 나가 남편과 같이 노래를 부를 정도로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유 회장님이 TV에 나온 나를 보신 것도 그 즈음이다. 평소에 즐겨보시던 프로그램이 아니었는데도 우연찮게 내가 나온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고 하신다. 유 회장님은 내가 중국 사람인데도 한국어를 잘 하고, 중국에 살면서도 모국어를 잊지 않고 남편에게도 한국어를 익히게 해서 같이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단다. 나는 [11시에 만납시다]라는 TV 방송에서 독창 후에 남편과 같이 ‘아리랑’을 불렀다. 그 모습을 인상 깊게 여기셨던 유 회장님은 그때 내 이름을 익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한국에서의 짧은 시간을 보내고 남편과 나는 중국으로 되돌아왔다.       그후 북경에 있던 어느 날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여동생의 남편 친구인 ‘이규철’ 이라는 청년을 소개시켜 주는 자리에 초대받았다. 당시 중국에는 개방의 물결이 일렁이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중국에 사업을 하려고 들어오고 있었다. 이 청년도 그런 무리 중의 한 사람으로 북한에서 건너와 중국에서 사업을 하려던 참이었다. 그 청년이 당시 유명했던 나를 소개받고 싶어 한 것이다. 식사를 하고나서 그 청년이 내 명함을 달라고 해서 주었고 그날의 만남은 그것으로 끝났다.     그후 그 청년은 상해에 갔는데, 그때 당시 유 회장님께서 사업차 상해에 오셨다가 그 청년을 만나게 된 모양이다. 그 청년은 어떤 사람과의 인연으로 상해에 있는 유 회장님을 찾아가게 되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고 한다. 그렇게 만난 인연으로 유 회장님은 청년에게 이것저것 선물을 사주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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