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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0> 열린 땅, 중국 모임을 순회하며

장화순
      사루비아의 미소     8월 28일 중국 길림성 심양공항. 입국 검사를 기다리는 외국인 행렬에 섞여 있으면서 나는 내국인 입구로 들어가는 옆줄의 중국인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검은 머리, 땅딸막한 키, 그을린 피부에 조만조만한 눈 코 입, 외견상으로는 한국인과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벽면에 걸린 공항시계는 정확하게 10시 2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나는 여전히 한국의 현지 시각을 가리키고 있는 내 전자손목시계를 보았다. 11시 25분, 그러므로 한국과 심양 사이에는 한 시간의 차이가 있는 셈이다. 아침 9시 40분경에 인천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약 1시간 40분의 시간을 공중에서 소비한 후였다.     공항에는 무순의 정 형제님 내외를 비롯한 몇 사람이 우리 일행을 마중 나와 있었다. 색이 바랜 듯한 푸른 하늘, 흰 이불보가 빨랫줄에 널린 듯 엷게 펼쳐진 구름이 서늘한 바람에 날렸고, 봄에서 초여름으로 막 들어간 듯한 날씨였지만 건조한 공기 탓에 체감 온도는 훨씬 낮은 그런 날이었다.     인천 공항을 출발해서 심양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모두 44명이었다. 서울, 광주, 인천, 전주, 제주, 순천, 안성 등지의 한국 형제자매들과 캐나다, 미국, 독일, 홍콩에서 온 형제자매들이었다. 뒤에 중국 주해에서 곧바로 심양으로 온 두 형제가 합류해서 일행은 모두 46명이 되었다. 일행은 두 대의 버스에 나누어 탔다. 우리를 태운 소형버스는 도심을 향해 달렸다. 포장은 되어 있다고 하나 신호등도 없고 교통법에 구속을 받지 않는 털털거리는 시골 길이었다. 그 시골길에는 규칙 같은 것에는 초연한 듯한 자유로움이 있었다. 길가에 서 있는 건물들은 대체로 키가 낮고 낡아 보였다. 그저 반듯하게 지어서 페인트를 칠해놓은 건물들이었다. 도로 주변 곳곳에는 울긋불긋 현란한 꽃들이 무더기로 심겨져 있었다. 접시꽃, 루드베키아 등 한국에서도 익히 볼 수 있는 꽃들 가운데 유난히 시뻘건 사루비아 꽃들이 보였다. 그저 볼품 없는 몸매에 립스틱만 진하게 발라놓은 시골 색시 같은 얼굴들이었다.     시골길을 달리며 나는 붉은색이 많이도 눈에 뜨인다는 생각을 했다. 택시도 붉은 색이었고, 간판이나 건물 벽에 씌어진 글씨들은 거의 대부분이 붉은색이었다. 간혹 붉은 바탕에 노란 글씨도 박혀 있었다. 나로서는 사전지식 없이 중국 땅을 처음 밟은 터였으므로, 그 색은 내 눈이 시리도록 선연하게 다가왔다. 여행 전에 서점에 가서 중국에 관한 책 한 권을 사기는 했지만 읽을 새가 없었다. 게으른 탓이 컸다. 한국의 44배,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크다는 중국의 지도를 얼핏 살펴본 게 전부였다. 후에 누군가로부터 중국은 땅 덩어리가 하도 넓어서 한두 군데 갔다 온 것 가지고는 갔다 왔다고 말할 수 없다는 말도 들었다. 그런 중국 땅은 편견 없는 생생한 느낌으로 내게 다가왔다. 심양의 시골길에서 받은 중국 땅의 첫인상을 말한다면, 대표칼라 빨강, 보조칼라 노랑, 컨셉-촌스러움이었다.     버스가 40분 가량 달렸을 때 큼직한 고층건물과 고가도로들이 나타났고 사위는 도시의 풍경으로 바뀌었다. 심양은 인구가 7백만에 육박하는 큰 도시이다. 특이한 점이라면, 장바구니를 앞에 단 자전거, 뒤에 사람을 태우는 인력거 형태의 개량된 자전거들과 세 바퀴 달린 소형차, 고급 승용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교통수단들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버스는 간판들이 중국어와 한국어로 씌어진 거리로 들어섰다. 병원, 주방용품 가게, 식당, 식품점 등이 즐비한 한국 타운에서 우리가 멈춘 곳은 한국식 대문으로 입구를 장식한 한국식당 앞이었다. 식당에서 자리를 잡고 앉아 아직 낯설고 서먹한 형제자매들과 눈인사를 나눈 후 서로 이번 여행 일정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을 보쌈 풀듯 주섬주섬 내놓는 동안, 종업원이 들어와서 순두부찌개와 된장찌개 중 하나를 고르라고 했다. 화제는 자연스럽게 무공해 식품과 유기농산물로 옮겨졌다. 과연 중국 두부나 된장은 어떤 콩으로 만들까, 콩은 얼마나 무공해일까 하는 이야기들을 주고받았지만 우리 대화는 별 합의점이 없이 끝났고, 점심식사를 마친 일행은 약 한 시간 거리인 무순으로 향했다.       약한 것들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다     인구 3백만의 도시인 무순은 탄광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무순 모임으로 가는 길 오른편에 탄광이 있어서 버스가 멈추어 섰다. 거대하게 파여진 석탄 계곡이 막 내려앉기 시작한 어스름 속에서 형체를 드러냈다. 잿빛 분진으로 싸인 구덩이에 석탄을 실어 나르는 구불구불한 바퀴 자국이 계단 모양으로 길게 이어져 있었고 군데군데 잡풀들이 돋아 있었다. 그 너머로 석양이 지고 있었다. 붉은 해를 머금은 서편 하늘은 마치 창조주의 사랑을 불태우는 듯 피를 토하고 있었다. 내 가슴은 한때 핏빛 혁명이 거쳐 갔던 이 붉은 대륙이 2천년 전 갈보리 산을 물들였던 하나님 아들의 피로 물들게 되기를 원하고 있었다.     저녁 6시경에 무순 모임에 도착하여 곧바로 저녁 식사를 했다. 같은 마당 안, 허름한 건물 1층 작은 강당은 한국에서 온 손님들을 기다리는 약 200여 명의 중국 형제자매들로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찬송가 자동 반주기에서 흘러나오는 반주에 맞추어 찬송이 이어진 뒤, 정 형제의 무순지역 소개가 있었다.     무순에 복음이 전해진 지는 10여 년이 되었다고 한다. 90년대 초반에 무순에서 먼저 일이 시작되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었다. 일은 자연스럽게 복음 전도로 이어졌지만 미약한 상태가 한동안 계속 되다가 94년 권윤자 여사님이 이곳을 방문하면서 급진전되는 계기를 맞았고, 비디오테이프를 사용한 전도에 박차가 가해졌다. 아직은 기계문명에 덜 오염된 사람들의 마음 밭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기 시작했다. 공산주의 체제에서 진화론의 교육을 받아서인지 전혀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이 대다수였지만, 말씀을 받아들이는 그들의 마음은 순전했다. 성경 속의 과학적인 사실들과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생생한 말씀들을 들으면서 진화론은 무참히 박살났고 수많은 영혼들이 영생의 열매를 맺는 쾌거들이 있었다. 복음의 씨앗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무순지역 형제자매들은 한국을 비롯한 해외로 나가기도 하고 변화를 거치면서 현재는 약 250명이 모이고 있다. 일요일마다 복음서 강해를 듣고 있고 전체 교제의 시간을 따로 가지고 있다.     이송해 형제의 통역으로 무순과 심양, 매화구 등지에서 온 형제자매들이 지역별로 나와 차례대로 간단한 인사를 했다. 무순 형제자매들을 대표하여 나온 5명의 형제자매들은 에베소서 1장부터 3장까지를 암송했다. 이 지역 형제자매들은 성경 암송을 생활화하고 있고 자주 모여 성경암송대회를 가진다고 한다. 심양의 한 젊은 형제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에베소서 2장 8절의 말씀을 듣고 구원받은 후, 한 달 동안 “내 죄 사함 받고서 예수를 안 뒤” 찬송을 하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한족 형제자매들도 상당히 많았는데, 예수님의 보혈로 죄 용서 받았음을 또렷하게 간증했다. 매화구에서 평생을 농군으로 땅과 함께 살아온 당 자매는 영혼의 갈증을 해소했으니 이제는 농사짓는 동네 사람들 모두에게 전도하겠다는 힘찬 결의를 보여주었다.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발견한 뒤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 사람들을 불러온 사마리아 여인의 모습과도 같았다.     벽 장식물 하나 없는 허름한 건물 안, 천장에 매달린 희미한 형광등 불빛 아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았다는 간단명료하고 분명한 간증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간증을 하는 이들은 도시의 화려함이나 세련됨과는 전혀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그저 가난하고 단순하고 땅처럼 질박한 그릇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을 택했고 이들은 구원받은 지 오래된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들고 있었다. 그 날 내 머리 속에는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고전 1:26-27) 하는 말씀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실제로 중국 성도들의 간증이 끝난 뒤 한국 손님들의 소개가 지역별로 이어졌는데, 그중 상당수가 새로운 생명의 힘찬 외침을 들으면서 자신의 안일했던 지난 생활을 반성했다고 말했다. 주해에서 오신 신 형제님은 구원받은 지는 오래되었지만 연수가 오래인 것에 비해 해놓은 일은 없다며 정말 부끄러운 삶을 살아왔다는 말로 입을 열었다. 주해에서는 1990년부터 일이 시작되었지만, 복음의 역사가 아직 미미하다고 한다. 주해의 최 형제 또한 새삼스레 모든 것이 아름답게 느껴진다며 참회했다. 나 또한 구원받은 지 오래 되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열렬히 복음을 전했던 시기는 잠깐으로 그쳤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입을 떼지 못하는 벙어리가 되어 있음을 참회했다. 나는 분명 주님이 하라 명하신 장사에는 능하지 못한 소자에 불과했다. 이날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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