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대 l 축소

<2005.12>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데살로니가후서 강해 중에서 2005년 10월 15일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하라     자기 고향이 어디인지 모르는 사람은 고향에 대한 노래를 들어도 남의 이야기처럼 듣습니다. 그러다 다른 사람의 고향에 여행을 가서 즐거운 일들이 그곳에 겹겹이 쌓인다면, 세월이 흐른 뒤 아련한 추억 속에 ‘다시 한번 가고 싶다.’ 하는 마음은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태어나 자라면서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이 있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타향을 오래 돌아다녀도 고향집이 그립습니다. 누구나 그렇습니다. 만일 이 세상을 살다가 옛날 자기가 살던 고향이 그리워서 고향에 관한 노래를 부르게 된다면, 그 노래는 실감이 날 것입니다. 옛날 다른 나라 사람들도 그런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들어 보았습니다. ‘아 그리워라, 나 살던 곳’, ‘그리운 날 옛날은 지나가고, 들에 놀던 동무 간 곳 없으니’ 하는 노래들. 무언가 추억이 젖어 있고 자기 삶의 흔적이 있는 곳에 마음이 향하게 마련입니다. 실제 경험이 묻어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의 노래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찬송 자체가 실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냥 ‘찬송가 중의 하나구나.’ 라고 쉽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참으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구주 되심을 확실히 안 사람, 삶에서 자기 영혼이 그분 계신 곳에 푹 잠겨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른 믿지 않는 사람들과 생각이 다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자기 고향을 그리워하고 가고 싶어하고, ‘꿈에 본 내 고향’ 하고 노래하듯이,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는 찬송이 그런 것 이상으로 강하게 자기의 소망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 위에 죄 범한 영혼 구하려  (찬송가 404장)       이런 찬송을 할 때에 우리 영혼은 벌써 직접 보지 못한 그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한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청중 앞에서 악기를 연주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악기를 연주하고자 하는 사람의 생각 속에는 그 악기와 자기 기억과 손끝이 벌써 음악을 한 아름 안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연주를 시작하면 그 소리는 그 안에서 흘러나오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자꾸 불러냅니다. 글 쓰는 사람이 글을 자꾸 끌어 당겨서 써 나가듯이,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은 연주하는 악기로 음악을 계속해서 찾아냅니다.     예전에 강원도에 있는 오래된 큰 사찰이 불에 탔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 후에 그와 관련된 새로운 뉴스를 하나 보았습니다. 강원도에 사는 어떤 악기 만드는 사람이 그 불 탄 사찰에 가서 타다 남은 기둥으로 -아마 좋은 나무였나 봅니다- 바이올린 두 개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 탄생했다’는 기사가 뉴스에 크게 보도되었습니다.     제 생각에 목탁은 툭툭 때려서 소리를 내고 바이올린은 부드럽게 현을 켜서 미끄럽게 소리를 내니까 바이올린과 목탁 치는 스님들과는 잘 맞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곤충들도 소리를 내는 방법이 서로 다릅니다. 여치는 날개를 비벼서 소리를 내고, 매미는 뱃속을 울려 소리를 냅니다. 그래서 이 목탁 소리와 바이올린 소리가 맞지 않는데 과연 어떻게 될까, 불교 신도들이 이 악기를 연주할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바이올린을 유리로 짠 장 안에 넣어 영구 보존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잘 만들어진 악기가 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냥 갇혀버린 것입니다.     악기는 다루는 사람이 있어야 많은 노래들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악기 자체가 노래를 간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녹음 재생기나 CD 플레이어, MP3 플레이어 같은 기계를 많이 사용합니다. 그런 기계들은 저장된 노래를 흘려 보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전자 악기같이 특별한 악기 외의 다른 악기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악기가 아니라 악기를 다루는 사람의 두뇌 속에 과거에 불렀던 노래들이 많이 잠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자기가 그리워하는 곳이 실감나면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릅니다. 악기의 주인에 따라서 그 소리는 달라집니다.     시편에는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150:6)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즉 숨을 쉬는 사람마다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말입니다. 동물들이나 곤충들이 내는 소리는 -구관조나 앵무새 같은 몇 종류의 새들을 제외하고- 과거 몇 천 년 긴 세월 동안 불렀던, 그 선조들이 부른 소리밖에 없습니다. 원숭이 떼를 다 모아도 그중에 합창단은 없습니다. 원숭이는 원숭이의 소리, 제 소리밖에 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다릅니다. 한 사람이 여러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이 동물과의 차이점입니다. 또 많은 소리들을 창조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창조자의 영광을 위해서 창조되었고 그분의 원대로 만들어졌지만, 많은 꾀를 내어서 자기 원대로 삽니다. 거기에서 고통과 괴로움들이 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과거의 추억이 있고 미래가 있듯이, 과거를 그리워하며 노래하고 앞날을 내다보며 노래했듯이, 이제는 내 영혼이 달려가는 그 길에 서서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그 가는 길을 마음속의 뜬 눈으로 바라보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와는 다른 노래로 젖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찬송을 하는 것은 그냥 노래를 부르는 것과는 다릅니다. 축음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축음기 바늘 아래 놓인 레코드판이 돌아가면서 다양한 노래 소리를 냅니다. 레코드판이 긁히면서 축음기에 연결된 스피커를 통해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우리가 찬송가를 부르면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세포들도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한번 진동을 같이 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입으로 노래를 부르고 그 소리가 코로 울려 나왔다 할지라도 분명히 우리 피 역시 떨림판이 되어 같이 울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뇌 속에 기록됩니다. 내가 이 세상에 살면서 어떤 노래를 불렀는지 전부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예수께서는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마 12:36)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무슨 말을 했든, 이 모든 것은 다 기억 속에 한 번 입력되었다가 나가는 것입니다. 내가 사는 동안 내 육체의 모든 세포는 하나의 떨림판으로 움직였습니다. 기억세포들은 그것들을 저장한 채로 세월을 보냅니다. 사람의 육체는 죽어도 그 영혼은 죽지 않습니다. 양심, 영혼은 늙지 않습니다. 조그마한 소년, 소녀들은 청년기를 내다보며 자라지만, 노인들은 젊을 때를 되돌아보며 추억합니다. 늙어서 죽는다는 것은 몸이 쇠약해져서 허물어지는 것이지, 영혼은 창창한 그대로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한 세월 속에서, 그러한 세상에서 믿음의 삶이라는 것은, 찬송을 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이론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정회원으로 가입하시면 전체기사와 사진(동영상)을 보실수 있습니다.

이전화면맨위로

확대 l 축소



* 온라인 쇼핑몰

글소리 PDF 웹북 펼쳐보기


* PC 버전 홈페이지 전환



Copyright (c) 2025 (주)많은물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