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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 교회사의 발자취를 따라

김길다    지금까지 대학생 형제자매들은 거의 해마다 방학 기간을 이용하여 성경의 관점에서 세계사적 사실들과 유대인의 역사, 그리고 홀로코스트(대학살)에 대해 많은 조사를 해 왔다. 그리고 그런 조사의 결과는 매년 국내외 성경탐구모임 때 형제자매들 앞에 전시, 소개되었다.     우리가 그러한 활동을 해온 지 벌써 수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우리만의 자료들은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또 수집된 것이 일부 있다 해도 어떤 기준이 세워지고 기획을 통해 정리되어 보관된 것은 아니었다. 앞으로도 이런 역사 부분에 대한 연구와 고찰은 꾸준히 계속될 것인데, 우리에게는 이런 과정을 뒷받침해 줄 자료들이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이번 유럽지역 성경탐구모임을 계기로 자료 수집팀을 만들게 되었다. 이 팀은 유럽 성경탐구모임 이후 4박 5일간, 성경탐구모임이 열린 베를린 인근 지역에서 얻을 수 있는 자료들을 모았다. 이번에 수집한 자료는 홀로코스트와 교회사에 관련된 것이었다. 이번 팀의 발족을 시작으로 앞으로도 우리 가운데서 이런 일들이 계속될 것이다. 세계 각지의 여러 형제자매들의 도움 또한 절실하다.     10월 9일 -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를 가다     자료 수집 여행의 첫날이다. 첫날 돌아보기로 한 곳은 작센하우젠(Sachsenhausen)의 수용소다. 이곳은 군사적 정치적 이유에서, 또는 노동력 확보, 처벌, 격리 등의 목적으로, 재판을 거치지 않은 사람들을 강제로 수용하던 시설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강제수용소는 교도소나 전쟁 법에 의한 포로수용소와는 다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강제수용소는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동네와 멀리 떨어진, 외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우리는 길을 따라 한참 동안 차를 몰았다. 베를린 시내 건물들과는 아주 다른, 소박한 농가와 허름한 건물들이 이어진 동네가 계속되었다. 인솔자가 없어 걱정하던 중, 일일 가이드를 자청하고 나선 베를린의 엄 형제는 차를 운전하면서 이것이 동독 지역의 시골 풍경이라고 했다. 구 동독의 시골길을 따라 한 시간 가량 달렸을 때, 우리는 작센하우젠의 강제수용소를 만날 수 있었다.     이 수용소는 1936년에 세워졌다. 처음으로 죄수들이 이곳에 들어오던 1938년 이후 제2차 세계대전까지 수용 인원은 3만5천 명으로 늘었다. 그리고 작센하우젠으로 보내진 총 20만 명의 죄수들 가운데 10만 명이 병과 강제 노동, 처형 등으로 사망했다.     수용소로 들어가는 길 벽에는 훗날 유대인 사진작가들이 찍었다는 추도의 사진이 크게 걸려 있었다. 이 길은 당시 수감되었던 수용소 사람들이 공장의 강제 노역을 하기 위해 왔다 갔다 했던 길이라고 했다. 당시의 기운이 내 시야를 통해 들어오는 것 같아 몸이 움찔해졌다. 역사의 시간 속에 묻혀버린 과거의 모습은 지금은 흑백 필름처럼, 마치 꿈속의 한 장면처럼 남아있지만, 그것은 여지없는 당대의 현실이었다.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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