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대 l 축소

<2005.10>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제37회 국내·외 성경탐구모임 2005년 8월 4일 오후   유대인과 이방인의 운명     이 기회에 성경을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문화적인 담을 넘어 한국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있는 이런 교제와 아무 상관없이 살던 타민족들이 어떻게 가까워지게 되었나 하는 것도 한번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 동네에 살아도 옆집 사람 얼굴을 알고 지내기도 힘든 세상인데, 도대체 우리에게 어떤 힘이 작용하기에 저 멀리 있는 멕시코, 과테말라, 니카라과, 태국, 필리핀 등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한 장소에 모여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요. 이런 것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성경이 말하는 ‘기적’이라고 하는 것이 따로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가 내 개인적인 운명과 무슨 관계가 있기에, 우리는 그것을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왜 성경은 그것을 계속해서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여러 가지 비유로 우리에게 비춰주고 있을까요?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크게는 역사를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작게는 내 개인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계획이 그 속에 숨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말씀을 통해서 비춰지고 읽혀질 때, 과연 나와 상관없다고 부인하며 지나칠 수 있는 것인지 한번 심각하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한참 세계적으로 계속해서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 중동 지역의 몇 억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 그 모두가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하며 자부심을 갖고 살고 있습니다. 유대인뿐만 아니라 아랍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같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부하는 사람 중에도 유독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만 그 주변 국가들과 대항해서 다른 길을 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냥 쉽게 ‘선택된 민족이니까.’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과연 왜 그럴까요? 그렇게 고집을 부리고 외곬으로 정책을 펴 나가는 이스라엘이라는 국가, 그리고 그 정치 세력 같은 것들이 과연 인간의 계획 안에서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이 성경을 통해서 하게 됩니다.     유대인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은 원래 이스라엘 사람이 아닙니다. 노아의 방주는 현재의 터키에 있는 아라랏 산에 머물렀고, 거기에서부터 열국의 백성들이 퍼져나갔습니다. 문명은 거기에서부터 동쪽으로, 동쪽으로 옮겨서 시날 평지에 이르렀고, 그곳에 바벨탑이 세워졌습니다. (창 11장 참조) 지금 현재 역사에서 가장 시끄러운 이라크라고 하는 나라의 ‘엘 바스라’, 즉 바그다드에서 남동쪽으로 약 10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그 도시 부근을 역사학자들은 바벨론이라고 지목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0장을 자세히 읽어보면, 노아에서부터 시작된 인류의 족보가 흘러갑니다. 그 족보에 아브라함의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창세기 10장 뒷부분에 셈의 자손들의 족보가 나오면서 벨렉의 시대에 세상이 나뉘었다는 기록이 나오고, 이야기는 아브라함의 가족이 아닌 다른 가족 쪽으로 흘러갑니다.     그런데 창세기 11장에 갑자기 바벨탑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 성과 대를 쌓아 대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4절) 하는 인간적인 계획이 나타납니다. 그 일이 있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세 아들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창 9:1) 는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 “충만하라” 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 보이다가, 갑자기 바벨탑이 무엇인가 앞에 우뚝 가리고 서 있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는 것을 보시고는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창 11:7) 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인간적인 계획이 하나님의 방법으로 완전히 무산되고, 바벨탑 쌓기를 그쳤다는 기록이 있은 후에야 바로 아브라함의 족보가 나타납니다.     성경에 순서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그냥 읽으면 족보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재미없고 지겨울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중간에 자꾸 가로막는 어떤 인간적인 계획, 현 시대로 말하자면 사람이 마음속에 쌓고 있는 어떤 종교탑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는 형체로써 우리에게 비춰집니다.     창세기 11장 중간에서부터 셈의 족보가 다시 나타나고, 이번에는 아르박삿에서부터 벨렉을 거쳐 아브라함의 가족으로 이어지는 족보가 죽 흘러갑니다. 이 사람들은 현재 이라크 지역, 이스라엘의 동쪽에 위치한 어느 지역에 살고 있었습니다. 아브람은 당시 갈대아 지역의 우르라는 이름을 가진 도시에 살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창 12:1) 고 명령하셨습니다. 훗날 성경학자들은 갈대아에서 시작해서 가나안 땅까지 들어가는 여정이 꼭 초승달처럼 생겼다고 해서, 그 지역을 ‘비옥한 초승달’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아브람이 아버지 데라와 조카 롯과 함께 ‘비옥한 초승달’ 지역의 제일 북쪽, 하란이라는 도시에 머물렀을 때, 아브람은 자기 아버지와 이별을 합니다. 아버지 데라의 생애가 끝이 납니다. 그렇게 철저하게 자기 옛사람의 모습, 자기와 육체적으로 연결되어 있던 그 고리들을 끊어 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 위해 아브람은 가나안 땅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하란에서 다시 출발했을 때 아브람의 나이는 75세였습니다.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그 후 아브람은 다메섹에서 엘리에셀이라는 종을 얻었고, 늙어가고 있는 자기 부인 사래와 조카인 롯을 데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람 앞에 “이상 중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창 15:1 참조) 이 창세기 15장은 아브람이 함께 데리고 온 조카 롯마저도 아브람을 떠나 버린 후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그야말로 인간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고리는 마지막 것까지도 다 끊어진 후에 아브람이 완전히 홀로 남아있을 때 하나님께서 하신 이야기입니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로라  (창세기 15:1-7)       아브람은 꽤 부자였습니다. “아브람이 애굽에서 나올새 그와 그 아내와 모든 소유며 롯도 함께 하여 남방으로 올라가니 아브람에게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더라” (창 13:1-2) 는 기록대로 육축도 많았고, 또 왕들과 전쟁할 때 보인 훈련된 용사들도 데리고 있는, 족장의 모습을 갖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자식이 없고 아무 희망도 없으니 다메섹 엘리에셀에게 자기 재산을 다 맡기겠다고 말했습니다. ‘자식이 없는데 도대체 나에게 무엇을 더 주시려고 하십니까?’ 아브람은 그런 한탄스러운 이야기를 하나님께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창조주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을 지으셨을 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창 1:28) 고 하셨던 그 말씀이 살아 있기 때문에 이 계획을 이루어 나가기 위해서는 한 사람이 필요했고, 그 사람의 육체를 통해서 자식이 날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것입니다. 그때 아브람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믿음 그 자체를 기뻐하셨고, 아브람의 의로 여기셨습니다.     이 일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마음속에 믿어졌을 때 ‘거듭났다’는 표현을 합니다. 여기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창 15:6) 라는 내용은 오늘날 우리가 겪는 모습의 그림자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약속하셨던 땅,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하셨던 ‘이 땅’은 어떤 땅입니까? 바로 가나안 땅입니다. 이 땅을 주기 위해서 아브람을 갈대아 우르로부터 끌어내셨던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어떤 땅이었습니까?     노아의 작은 아들 함이 아버지가 포도주에 취해서 벌거벗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 형제들에게 고한 후, 함의 아들 가나안은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창 9:25) 고 말하고 있습니다. 참 특이한 내용입니다. 그 저주받은 민족들이 진을 치고 있던 땅을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육체에 행한 언약의 표징, 할례     그런데 창세기 15장 8절에 참 특이한 내용이 나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께 묻습니다.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창세기 15:8)       다시 말해서 ‘증거가 무엇입니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예언하셨습니다.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 네 자손은 사 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창 15:13-14, 16) 바로 아브람이 가족을 데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후에 기근을 피해서 애굽을 다녀왔듯이, 그 아브람의 몸속에서 태어나게 될 후손들이 애굽을 거쳐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이 내용이 출애굽기에서 나타납니다. 이 말씀이 있은 후에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창 15:17) 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다음에 훌쩍 뛰어넘어 창세기 17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아브람의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1절)       어떤 모습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셨다’ 라는 표현으로 되어 있습니다. 15장의 ‘이상 중에 임하셨다’는 것과는 조금 표현이 다릅니다. 무엇인가 조금 더 가까운 듯한 표현입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 아브람이 엎드린대 하나님이 또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1-5절)       그 다음, 8절부터 보겠습니다.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
정회원으로 가입하시면 전체기사와 사진(동영상)을 보실수 있습니다.

이전화면맨위로

확대 l 축소



* 온라인 쇼핑몰

글소리 PDF 웹북 펼쳐보기


* PC 버전 홈페이지 전환



Copyright (c) 2025 (주)많은물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