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대 l 축소

<2005.10> 아, 하나님의 은혜로

김희진 | 수원     혼란스러웠던 학창 시절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부모님이 구원받고 교제 안에서 생활하셨기에 나는 자연스럽게 교회를 알아갔다. 동네에서 어른들의 모임이 있는 날이면 내 또래 아이들도 같이 모였다. 우리는 어른들을 모두 이모, 삼촌이라고 불렀고, ‘초롱 선교원 초롱 선교원 우리들의 꿈동산’ 노래를 부르며 모임을 하는 곳 1층의 유치원에 다녔다. 그곳은 내게 집과 같은 곳이었다.     교제 안에서 자라며 5학년이 되었다. 5, 6학년은 또래의 학생들과 함께 성경탐구모임 장소가 아닌 캠프장에 가서 성경 공부를 하기 때문에 일찌감치 여름이 기다려졌다. 선교원과 주일학교, 부모님과 어른들이 그토록 말하던 그 ‘구원’! “가서 열심히 말씀 들어라, 구원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던 ‘구원’이 나는 학교에서 공부를 열심히 하면 받는 상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주일간의 말씀이 끝나고 강사님이 “구원받은 사람, 일어나 보세요.” 라고 말씀하시자, 나는 심장이 두근두근 뛰고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주위를 살폈다. 옆에서 같이 생활하며 말씀을 들었던 친구들은 하나 둘씩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고, 나는 마음이 급해져 강연을 메모한 노트와 성경책 이곳저곳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내가 자라온 가정 환경은 다른 사람과 조금 달랐다. 그래서인지 어려서부터 인생이 무엇인지,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할 때가 많았다. 뒤로 메는 책가방이 무겁기만 했던 시절, 유난히도 동요를 좋아했던 12살짜리 아이에게는 믿고 기댈 곳이 필요했다. 학교에서는 누구보다 활발했지만 집에 들어오면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힘들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친구들과 지내는 시간은 점점 더 많아졌고, 그만큼 부모님과의 사이는 더 멀어지고 있었다. 가족이 무엇인지, 왜 내가 선택하지도 않은 길을 가야하는 것인지 몰랐지만 크면 다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곤 했다. 그러나 내게 돌아오는 것은 불만뿐이었다.     중학교 2학년이 되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말씀을 들은 이후로 많은 말씀을 들었고, 강연 중 성경 구절을 찾는 그 순서까지도 외우고 있었다. 구원에 대한 마음의 간절함은 불안함이 되었다. 무서운 꿈이라도 꾸는 날이면 두려운 마음으로 부모님 방으로 살금살금 걸어가 문을 열어보고는, 곤히 주무시는 부모님의 얼굴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어야 했다. 교회에서 친구들이 간증을 하는 날이면, 두려움과 답답함으로 기분이 상해 집에 돌아오곤 했다.     그해 여름에도 어김없이 성경탐구모임이 열렸다. 분주하게 움직이며 봉사하는 언니오빠들을 부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며 이번에도 구원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집에 돌아가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사실 제발 나를 좀 구해달라는 기도였다. 일주일은 금방 흘러 마지막 날이 되었고, 말씀이 끝나고 많은 사람들이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나는 성경책을 들고 제일 먼저 상담 받는 장소로 달려갔다. 상담을 해주시는 분은 요한복음 5장 24절을 펴라고 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내가 그토록 바라던 구원은 손으로 만져지는 것도 아니고,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닌 바로 ‘믿음’이었다. 다 해 놓으신 구원을 믿는 것이었다.     이렇게 나는 구원받았지만, 신앙생활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알지 못했다. 중학교 3학년 때 부모님과 함께 수원 모임집으로 들어가 살게 되었다. 집과 같이 편안했던 모임은, 이제 내 모든 개인 생활이 그대로 보여지는 부담스러운 곳이 되어버렸다. 아무리 방문을 열쇠로 꼭꼭 잠가두어도, 외출했다가 돌아와 보면 언제나 내 방은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내 행동 하나하나는 어른들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부모님 역시 내게 이런 저런 간섭을 하시는 일이 많아졌고, 나는 그런 부모님에 대한 불만이 쌓여 갔다. 모임의 소중함은 느낄 수 없었다.     나는 부모님과 상의한 후 졸업을 하면 유학을 가기로 결심했다.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소망     고등학교 2학년이 되자, 입시 준비로 학교 생활에 바빠졌다. 나 역시 겉보기에는 다른 친구들과 같은 평범한 입시생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공부를 해야 하는 의미를 찾지 못한 채 시간을 흘려 보냈다. 그로 인해 나는 더욱 더 가중된 입시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고, 때마침 집안에 불어닥친 혼란스러운 일들은 공부에 바빠야 할 나를 점점 더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항상 속이 좋지 않아서 소화제를 물마시듯 자주 먹었고, 툭하면 위경련이 일어나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갑작스럽게 소중했던 두 친구의 자살과 맞닥뜨렸다. 친구의 장례식에 가는 길이 얼마나 무섭고 두렵던지, 죽은 친구에게 미안했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은 그 친구들이 좋은 곳으로 갔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들의 영혼이 간 곳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정말 슬퍼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었다.
정회원으로 가입하시면 전체기사와 사진(동영상)을 보실수 있습니다.

이전화면맨위로

확대 l 축소



* 온라인 쇼핑몰

글소리 PDF 웹북 펼쳐보기


* PC 버전 홈페이지 전환



Copyright (c) 2025 (주)많은물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