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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9>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제37회 국내·외 성경탐구모임 2005년 8월 1일 저녁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이라야 그 도에 행하리라 그러나 죄인은 그 도에 거쳐 넘어지리라 (호세아 14:9)       모든 책 중의 으뜸, 성경     우리가 숨을 쉬면 폐에 공기가 가득 들어갑니다. 공기가 들어가면 우리 혈액은 공기 중에 21%를 차지하는 산소를 받아들입니다. 혈액이 받아들인다고 하면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습니다만, 폐 혈관 끝부분에 있는 폐포라고도 하고 허파꽈리라고도 부르는 곳에서 산소를 받아들입니다. 허파는 스펀지처럼 생겼고 그 안에 혈관의 끝이 있습니다. 음식을 먹고 만들어진 혈액이 거기에서부터 온 몸을 돌면서 뇌에까지 산소를 전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많은 세포들에 산소를 전달해 줍니다. 적혈구가 바로 그 운반책으로, 적혈구의 헤모글로빈이 그 일을 합니다. 또한 적혈구는 세포에 산소를 전달하고 이산화탄소를 몰고 나오는 역할도 합니다. 그래서 허파꽈리에 들어온 후 이산화탄소와 허파꽈리 속에 있는 산소를 교환합니다. 그때 적혈구는 상당히 붉은 색으로  변합니다.     이런 순환 과정을 생각해 보면 정말 우리 모두가 산소를 중요하게 여기고 감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평소에, 살아 있을 때 어디서든지 공기 값을 낸 사람은 없습니다. 전 세계 각 나라의 정부에서 사람들이 들이마시는 공기에 세금을 매긴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공기는 대기권 밖이 아니라면 어디든지 다 있습니다. 밀폐되어 진공상태인 장소 외에는 다 있습니다. 우리가 숨 쉬는 이 공기는 우리에게 산소를 운반해 주는 하나의 그릇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닙니다.     산소는 호흡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을 통해서도 공급됩니다. 소화기관을 통해서도 공급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선한 채소 같은 것을 많이 찾습니다. 이번 기회에 피의 중요성도 조금 알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이렇듯 산소라든지 마시는 물, 청량음료 이런 것이 사람의 기분과 건강 상태를 좌우한다면,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입니다. 밤에 잘 자고 일어나서 아침식사 잘 하고 출근하는 중에, 아니면 집에서 가족들과 이야기하는 중에, 서로 주고받는 어떤 대화나 전화 통화에 마음이 상한다면 먹은 음식이 제대로 소화되지 않습니다. 기분에 좌우되는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말의 문제입니다.     말이라는 것은 나쁘게도 쓰일 수 있지만 좋게도 쓰일 수 있습니다. 서로 다투거나 기분 상할 때 상대방이 주먹을 흔들면 “말로 하자!” 하는 말을 종종 합니다. 우리는 말의 중요성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시간을 보낼 때, 내 생각을 정돈해 가면서 돌 징검다리 한번 더 두드려보고 밟듯이, 안심하고 딛고 나가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몇 주 전에 뉴스를 보고 조마조마했던 일이 있습니다. 지하철역 안에서 두 사람이 걸어오는데, 키 큰 사람은 막대를 잡고 짚으면서 플랫폼 안쪽으로 걸어오고 키 작은 사람은 바깥쪽에 서 있었습니다. ‘아, 저 사람 참 뭔가 잘못 걷고 있다’고 느낀 순간 키 큰 사람이 플랫폼 아래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역무원들이 쫓아와서 끄집어냈는데 곧바로 전철이 지나갔습니다. 잘못했으면 큰 사고가 날 뻔한 것입니다. 젊은이들은 옆에 어느 여성과 갈 때는 여성의 나이가 많든 적든, 꼭 길 쪽에 서 주는 정도의 상식은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노약자나 환자와 같이 걸을 때도, 젊은 남녀 간에 데이트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 정신 나간 사람이 인도까지 차를 덮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하철이 지나가는 선로쪽에 장님이 걸어가고 있었고, 두 눈 멀쩡히 뜬 사람은 안전한 쪽에서 걸었다니, 때와 장소에 따라서 자기의 걸음도 재확인하고 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세상의 법이나 관습을 무시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가지고 묵묵히 이야기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어째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사람의 주장에 따라서 전하는 방법이나 그 내용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성경은 절대적인 진리입니다. 이 성경 말씀은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법이며 교훈이며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만약 어떤 생각을 정돈하려 한다면 성경을 읽으십시오.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글이 있다면, 내 생애를 다 맡겨도 괜찮은 책이 있다면, 또 내 시간을 많이 들여서라도 꼭 읽어야 될 책이 있다면 성경이 모든 책 중에 으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도 잡다한 책들을 좀 많이 읽은 사람입니다. 어릴 때부터 저는 욕심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어떤 사람보다도 책을 많이 읽었다는 자부심을 갖고 살겠다고 작정한 사람입니다. 그러다가 스물여섯 살쯤 되었을 때 어떤 젊은이와 대화하다가 시험을 한번 치렀습니다. 그 젊은이는 제게 “혹시 모르는 것도 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모르는 것 빼놓고는 다 안다”고 대답했습니다. 서로 웃었습니다.     즐거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독하게 우리를 억압하는 공부에 대한 책임감이라고나 할까, 그 책임감에서 해방된 사람은 이 지구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성경에 보니까 그 답이 나옵니다. “내 아들아 또 경계를 받으라 여러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케 하느니라” (전 12:12) 는 말씀이 있습니다. 공부가 몸을 피곤케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의 건강을 생각해 보면 공부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었나 싶습니다. 공부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도 엄청나게 많지 않습니까. 어느 봄날 한 젊은이가 자신이 원했던 대학에 떨어지니까 그 대학 뒤뜰에 있는 정원에서 목을 매 죽었다는 기사가 났습니다. 신문에 그런 기사가 심심치 않게 나던 때가 있었습니다.     무엇을 공부하느냐, 왜 공부하느냐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학생보다 어머니가 더 분주합니다. 평소에 사먹지 않던 엿을 사서 학교 정문이나 어딘가에 붙여놓고 아이들이 시험을 잘 치르기를 비는 어머니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한국적인 방법입니다. 이제 여러분들 중에 대학이나 어느 시험에 합격되기를 원하는 사람과, 시험 쳐서 어디 좋은 데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 외에는 공부에서 한번 해방된 사람이라고, 아니면 해방된 기간이라고 생각하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성경을 공부해야 되겠는지 하지 않아도 되겠는지 제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성경이 바꿔놓은 삶     저에게 성경이 없었다면 지금 제가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상상을 해 봅니다. 옛 시인 정철이 쓴 시에,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니 두 분 곧 아니시면 이 몸이 살았을까”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남들은 소박한 꿈을 이야기하지만 저는 체구가 작은 반면에 꿈은 조금 컸습니다. 그것을 남에게 절대 말하지 않았습니다. 남들이 좋아하는 어떤 권력을 쟁취하는 것이 아니고, 명예나 어떤 사랑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꼭 가지고 싶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살면서 남자로서 무언가 한번 해보고 싶은 것이 어릴 때부터 있었는데 자라서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때 저는 꿈이 아주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꿈을 분석해 보니까 결국 욕심밖에 없었습니다. 나중에 전도서에서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일반인 그것은 해 아래서 모든 일 중에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다가 후에는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9:3) 는 성경 구절을 보고 ‘야, 이 말씀은 내 청사진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성경 때문에 이제 다른 걸음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 스스로 생애를 바꾼 것은 아닙니다. 성경이 아니었다면 저는 지금 아마 다른 사람으로 살고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그만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이 사는 동안 의식주 생활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없어야 할 병이 따르고 있습니다. 저는 어릴 때 오랫동안 아픈 적이 있습니다. 저만큼 나이 드신 분이나 조금 더 나이 드신 분들 중에 저처럼 많이 아파 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오래 전에 어느 의사가 저를 누우라고 하고 발목을 잡아 앞으로 밀었다 뒤로 당겼다 자꾸 하더니 말했습니다.     “맹장입니다. 일주일 안에 수술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이럭저럭 바쁘다 보니 수술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 자주 한번씩 진통이 있었습니다만 그것을 아직 정리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쓸데없는 고집일지는 몰라도 제게는 맹장이 필요하니까 한번씩 아파도 그냥 두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팠던 것들 때문에 40여 년간 제 몸에 대해 많은 연구를 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도 건강에 대해 자주 이야기를 해왔습니다. 그런데 막상 제가 아플 때는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며칠 전부터 몸이 점점 안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엊그제 아프기 시작할 때 생각해 보았습니다. ‘야아, 커다란 시련이구나. 한번 견뎌 보자. 지금까지 어떻게 견뎌 왔는데....’     이런 찬송가가 있습니다.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예수께로 나옵니다자유와 기쁨 베푸시는 주께로 옵니다병든 내 몸이 튼튼하고 빈궁한 삶이 부해지며죄악을 벗어버리려고 주께로 옵니다       낭패와 실망 당한 뒤에 예수께로 나옵니다십자가 은혜 받으려고 주께로 옵니다슬프던 마음 위로 받고 이생의 풍파 잔잔하며영광의 찬송 부르려고 주께로 옵니다       교만한 맘을 내버리고 예수께로 나옵니다복되신 말씀 따르려고 주께로 옵니다실망한 이 몸 힘을 얻고 예수의 크신 사랑 받아하늘의 기쁨 맛보려고 주께로 옵니다       죽음의 길을 벗어나서 예수께로 나옵니다영원한 집을 바라보고 주께로 옵니다멸망의 포구 헤어 나와 평화의 나라 다다라서영광의 주를 뵈오려고 주께로 옵니다  찬송가 (330장)       가사 중에 “병든 내 몸이 튼튼하고”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저는 제가 지금까지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을 어떻게 이겨왔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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