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회 국내·외 성경탐구모임 2005년 8월 3일 오후
우리 가운데 살아있는 말씀
제가 살고 있는 미국의 집에서부터 성경탐구모임이 열리는 이곳까지 오는데 정확하게 스무 시간 정도 걸립니다. 올 때는 그 길이 그렇게 멀고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저 위층에서 강단을 내려다보니까 이 거리가 더 멀게 느껴졌습니다. 얼마나 까마득하게 멀리 보이는지. 또 위에서 내려다보니까 앉아 계신 분들의 숫자가 얼마나 많은지 ‘저 앞에 나가서 어떻게 이야기를 하지?’ 하는 생각이 덜컥 일어났습니다. 이런 강연을 처음 하는 것도 아닌데 할 때마다 ‘혹시 내가 실수를 하면 어떻게 할까?’, ‘혹시나 말 한 마디를 잘못해서 어떤 영혼을 망치는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할까?’ 하는 두려움을 느낍니다.
저는 이런 곳에 나와서 설교를 할 만큼, 또 성경을 가지고 ‘이것이 진리다.’ 라고 이야기할 만큼 성스러운 사람도 못 되고 생활이 부끄러울 때도 많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한번도 성경 강연이라고 하는 것을 하고 싶어한 적이 없습니다. 처음 강연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도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고 어떻게 하다가 하게 되었고, 그 이후에도 강연하러 나올 때마다 한편으로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혹시 이것이 내가 해야 될 일인데 잊어버리고 도외시했을 때, 아니면 일부러 피하려고 다른 쪽으로 방향을 틀었을 때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생각하실까?’ 먼저는 제 개인을 걱정해 보는 것입니다. 마치 자녀들이 ‘내가 이런 나쁜 짓을 했을 때, 우리 부모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겠지요. 그 다음에, ‘내가 꼭 해야 하는 일인데 이것을 무시하고 도망갔다가 혹시나 내 입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들어야 될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들을 기회를 놓치게 된다면, 내가 과연 하나님 앞에 그 책임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하는 마음속의 싸움이 항상 있었습니다.
이번 성경탐구모임에 오기 전에도 그랬습니다. 제가 지금 살고 있는 곳에 조금 복잡하고 어려운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이 모임 기간에 딱 맞춰 저한테 힘든 일이 하나 들이닥쳤습니다. 가지 않을 수 있는 핑계가 생겨서 한편으로는 ‘잘되었다.’ 싶은 생각도 들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어 혼자 여러 가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지금 어떻게 할까?’ 자문해 보았습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그 책임감에 대해서.’ 그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꽤 오랜만에 요나서를 읽게 되었습니다. 요나서를 읽으면서 참으로 마음속에 감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면 ‘요나가 도망가려다 뉘우치고 니느웨 성에 가서 전도한 이야기를 읽고 저 강사도 회개했구나.’ 아마 이 정도로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런 것도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가 이런 곳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이 세상의 많은 목사들과 성경 강연자들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 1:1, 4) 는 성경 구절을 많이 접하고 외우기도 하며, 이것을 외치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 ‘생명’이 무엇입니까? 생명이 있으면, 첫 번째 나타나는 현상은 꿈틀거리고 움직이고, 무엇인가 멈춰있지 않고 계속해서 행동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 발표하고 있는 것은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는 것입니다. 그 후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요 1:14)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히브리서의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히 4:12) 라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다.’ 고 했습니다. 또 베드로전서에서도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벧전 1:23) 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다고 했습니다. 이 ‘살아 있다’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제가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고, 또 이야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창세기라는 책을 쭉 읽다 보면 씨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피가 유전되는 과정과, 자녀가 태어나고 그 태어난 자녀들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많은 이야기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 2005년이라는 시간 속에, 발달된 문명과 많은 매스컴을 접하면서 살고 있는 이 시대에 과연 성경이라는 이 책이 “살아있다. 운동력이 있다. 관절과 골수와 혼과 영을 찔러 쪼갠다.”는 그 말씀과 같이 우리에게 어떻게 실감이 나게 느껴지며, 어떻게 다가오는지 아주 구체적으로 한번이라도 생각을 해 본 분이 계신지 묻고 싶습니다.
제가 지금 요나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요한복음을 이야기하고 또 창세기 이야기를 하니까 ‘지금 저 강사가 오랜만에 많은 사람들 앞에 나와서 정신이 왔다 갔다 하나?’, ‘요나서하고 창세기가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어?’ 아마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여러분들께 꼭 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여러분들이 이 세상을 살다가 참 다행스럽게도 성경 말씀을 접하고 한번 거듭난 경험이 있었다는 분들이나 또는 ‘나는 거듭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하는 생각을 가진 분들, 이렇게 다양한 생각의 차이를 가지고 계신 분들이 이렇게 말씀을 함께 접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 개개인들에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음란한 여인 된 이스라엘
이번 성경탐구모임의 주제 성구를 한번 볼까요? 호세아서 14장 9절입니다.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이라야 그 도에 행하리라 그러나 죄인은 그 도에 거쳐 넘어지리라
호세아서에는 어떤 스토리가 있습니다. 호세아서는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이 왕들이 유다 왕으로 있을 때 살고 있던 호세아라는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신 말씀의 기록입니다.
그런데 이 호세아서를 읽어보면 낯이 뜨거울 정도로 창피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명령하시기를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호 1:2) 고 하셨습니다. 성경에는 고상한 말로 “음란한 아내” 라고 적혀 있습니다만 흔히 쓰는 말로 하자면 창녀입니다. 그런 여자를 아내로 삼아서 자식을 한번 낳아 봐라, 이런 이야기입니다. 이런 말을 들었을 때 기분 좋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가 이 호세아서 첫 부분부터 시작됩니다.
호세아서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바벨론으로 이동하기 약 150년 전에 기록된 책입니다. 음란한 여자를 취해서 자식을 낳으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종인 선지자 호세아에게 그런 명령을 하시자 호세아는 말씀에 복종해서, 고멜이라는 여자를 아내로 취했고 자식 셋을 낳았다는 이야기가 호세아서 1장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 계속 서술되는 내용은 이 음란한 여자처럼,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바로 내게 그렇다 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하나님의 짝으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이 세상에 정해 놓았는데 마치 창녀가 몸을 팔듯이, 간음을 행하듯이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는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고 산당에서 제사를 지내고 하는 그런 행동들이 만연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행동들은 하나님을 도외시하고 하나님께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을 호세아서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내용들이 서술되고 나서 제일 마지막 절에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이라야 그 도에 행하리라 그러나 죄인은 그 도에 거쳐 넘어지리라” 는 말씀을 우리에게 하고 있습니다.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
지금부터 약 2천 8백 년 전에 기록된 이 말씀이 현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궁금해 하는 분들도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창세기부터 시작되는 이 구약 성경은 정말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어느 교회 목사들이 하는 ‘할렐루야. 아멘. 감사합니다.’ 식의 설교와 기도가 아니라, 지금 우리 눈앞에 나타나 있는 어떤 현상이나 역사적인 사실들이 성경 말씀에 비추어 바로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그대로 들려지고 있다는 것을 이 구약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4장을 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내용일 것입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범하고 불복종함으로써 범죄하여 죄인으로 전락된 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아담이 하와와 동침해서 자식을 낳았습니다. 몇 명 낳았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냥 ‘자식을 낳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중에 가인과 아벨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두 아들 가운데 형인 가인은 저주받은 땅에서 열심히 밭을 갈고, 곡식이 가시나 엉겅퀴들에 상하지 않고 잘 자라게 손에 흙을 묻혀가면서 열심히 키워서 그중 제일 좋은 것들을 하나님 앞에 바쳤습니다. 그런데 동생인 아벨은 별로 한 일이 없습니다. 양떼를 들판에 풀어놓고 알아서 풀을 뜯어먹고 잘 자라는 양의 첫 새끼 한 마리를 잡아서 하나님 앞에 바쳤습니다. 이 이야기는 다 잘 아시는 내용일 것입니다.
그렇게 형님과 동생이 행한 그 두 가지 일을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형님은 자신이 열심히 노력한 결과를 하나님 앞에 바쳤고, 동생은 그냥 풀을 먹고 자라난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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