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북미지역 성경탐구모임 7월 24일 저녁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데살로니가전서 1:3-5)
예수님과 삭개오의 시선이 오가다
누가복음 19장 1절부터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 가라사대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그런데 그 백성이 저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가로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노이다 하였더라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은 준 종들의 각각 어떻게 장사한 것을 알고자 하여 저희를 부르니 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그 둘째가 와서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이 와서 가로되 주여 보소서 주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두었었나이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을 알았느냐 그러면 어찌하여 내 은을 은행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변리까지 찾았으리라 하고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저희가 가로되 주여 저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주인이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리고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27절까지 읽었습니다.
이 성경을 읽는 동안 마음에 어떤 각오를 하고 애써서 많은 노력을 하고, 열심히 한번 찾아보겠다는 마음이 생겼을 것입니다. 뜻밖에 문제가 해결되어서 기뻐하는 분도 계시겠지만, 아직 해결이 안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공부하면서 이런저런 것 다 잊어버리고 예수님을 만나려는 삭개오의 마음을 읽고 그 마음을 이해해 보려는 생각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이야기, 하나님의 아들 예수에 대한 이야기, 그분이 죄에 빠져있는 인간을 구원하러, 인간의 몸을 쓰고 죄로 물든 이 세상에 오셨다는 내용을 우리는 듣고 배워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하나의 내용 속에서 누가는 조금 다르게 한 사람을 소개했습니다. 바로 삭개오라는 세리장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세무서에서 높은 사람입니다. 세금을 잘 걷는 아주 착실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돈이 많은 부자였는데, 예수님을 만나려고 마음먹고 찾아왔습니다. 세리장이면서 돈도 많으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눈살 찌푸림을 받기도 하는 정도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키가 작아서 예수님을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었습니다.
어떤 위대한 사람이나, 대단한 사람이 나타나면 서로 보려고 하니까 키가 큰 사람의 등쌀에 밀려 작은 사람은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의자나 높은 물건을 딛고 서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삭개오도 유명하다는 예수님을 보고 싶어했지만 키가 큰 사람들이 예수님을 다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나무에 올라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세무서에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지만, 자기 부하 직원들이 거기 있는지 없는지 상관하지 않고, 체면도 싹 무시하고, 위신은 안중에도 없이 나무 위에 올라갔습니다. 뽕나무를 자신이 의지할 한 매개체로 결정한 것입니다. 뽕나무라도 짚고 올라서서 내려다보면 잘 보이겠다 싶어서 올라갔습니다.
예수께서 그 아래를 지나가시게 되었는데, 그곳에 이르러 뽕나무에 올라간 삭개오를 우러러보시고 그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삭개오는 예수님께 자기 이름을 알려 준 적도 없고, 또 예수님도 세무서에 가서 키 작은 이 사람이 누군지 알아 본 적도 없었습니다. 삭개오는 세간에 이름이 떠도는 그 유명한 예수라는 사람을 꼭 한번 만나야겠다는 마음으로 나무에 올라갔는데, 예수님은 지나가시다가 삭개오에게 그냥 내려오라고 하신 것도 아니고 속히 내려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여 있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서로 보려고 둘러싸고 있는데, 이 예수는 나무를 향해 우러러 보면서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삭개오가 급히 내려오는 그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철봉에 올라 있거나, 덤블링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냥 풀쩍 뛰어내리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나무 위에 올라갈 때 수고한 만큼 내려올 때도 수고를 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순간, 모여 있는 모든 사람의 눈이 삭개오의 몸 움직임에 집중되었습니다. 그쯤 되면 그는 체면이나 염치는 다 소용없는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삭개오에게 빨리 내려오라고 하시면서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되겠다”고 하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과 삭개오를 주목하며 바라보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저 사람이 선한 줄 알았더니 죄인의 집에 유하러 간다.’ 이런 비난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것과 전혀 상관없이, 삭개오와 사전에 미리 서로 주고받은 말도 없이 단번에 “삭개오야, 내려오라! 내가 네 집에 유하여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삭개오와 어떤 이해 관계도 없고, 삭개오도 무엇인가를 부탁한 적이 없고, 그분을 부른 적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삭개오를 부른 후에,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기 위해 나무에 올라간 상태도 아닙니다. 사람으로서 삭개오의 삶이 따로 있었고 예수님의 삶이 따로 있었습니다. 삭개오가 먼저 예수님을 보려고 나무 위에 올라가느라 수고하는 도중에 밑에서 예수님이 삭개오를 먼저 보았는가 봅니다. 예수님이 우러러보시고 하신 말씀을 들은 삭개오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우리 각자 생각해 봅시다. 사람들은 죄인의 집에 예수가 머무르려고 들어갔다고 수군수군했지만 거기 모인 군중들이나, 동네 사람들이나, 삭개오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나, 예수를 따라온 많은 사람들의 대화는 예수님께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삭개오와 예수님의 대화만이 여기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지방으로 가면서 한 사람을 향해서 이야기하시고, 뽕나무에서 내려오라고 하시고, 청하지도 않은 집에 직접 찾아가셔서 만나셨습니다. 또 그와 이야기하고, 그가 하는 모든 이야기를 들으시고, 그 사람에게 어떤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이 장면은 글로 읽는 것보다 연극을 통해 보면 아주 또렷하게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글로 읽으니까 먼저 읽은 것은 흐릿해지고, 뭐가 뭔지 모르게 되는 때도 있을 것입니다.
두 사람의 대화 속에 한 인생의 삶이 결정나버리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여기에 한번 더 눈길을 돌려야 될 책임이 있지 않습니까. 삭개오는 예수님이 보고 싶어 나무에 올라갔고, 예수께서는 삭개오를 우러러보시고 내려오라고 하셨습니다. 삭개오는 자기 집에 유하겠다는 예수님의 소리를 들어 봤고, 예수님께 직접 말해 봤고, 또 새로운 소리를 들어 봤습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오고갔듯이 이제 우리도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한번 귀담아 들어 보고 읽어 볼 책임이 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 고 했기 때문에, 책임을 갖고 살펴야 될 것 같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을 읽어봅시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사도 바울이 말하기는 했지만,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 말씀으로 받음이니” 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성경의 기록은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가지고 전하는 사람들의 말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사람이 읽는 글이지만, 말씀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내가 저 사람을 잘 알고, 저 사람의 과거도 아는데, 감히 성경을 들고 이야기하다니!’ 그러나 누가 읽었든지, 그가 읽은 성경 구절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들었거나 같이 읽을 때 설교자의 말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혹시 설교자들이 이해를 돕기 위해서 말을 좀 다듬거나, 다른 예를 드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생김새의 사람이 그 내용을 말했든 직접 지적하고 있는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와 같이 삭개오와 예수님의 대화 중에 주고받은 내용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하셨거나 삭개오가 했거나 사람들이 비난하기 위해서 한 말이나 이미 성경에 기록되어서 우리에게 전파되는 것은 다 하나님이 기록하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는 말씀과 같이 들은 말씀이, 배운 말씀이 기억되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믿는 자 속에 역사하게 됩니다.
하나님 아들의 소리를 듣고 나무에서 뛰어내린 삭개오
삭개오라는 사람의 가정에 어떤 일이 생겼습니다. 이 사람은 일찍이 예수님을 한번 뵙고 싶고, 예수님을 알고 싶었지만, 키가 작아서 나무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밑에서 먼저 그를 우러러보시고 빨리 내려오라고 했습니다. 이 삭개오의 귀를 통해서 마음속에 새로운 소리가 하나 들어갔습니다. 그가 세상에 사는 동안 귀를 통해 상관의 소리도 들어갔을 것이고, 어릴 때부터 자라면서 동네 어른들의 소리도 들어갔을 것이고, 선생님에게 배운 소리도 들어갔을 것입니다. 인간의 여러 가지 소리가 그의 귀를 스쳐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리라” 하는 말씀은, 이 세상 사람들의 소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소리가 인간의 입을 통해서, 그의 귀를 통과한 것입니다. 삭개오의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천지를 지으신, 바다와 육지와 모든 것을 지으신 분의 소리입니다. 창조자로 계시던 분이 인간의 몸을 쓰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아들의 소리입니다. 말하자면 구약 성경에 예언해 놓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의 소리입니다. 이것을 옛날 사도들은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1:1) 하고 히브리서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서 말씀하셨던 분이 이제는 하나님 아들의 입으로 직접 말씀하신 것입니다.
삭개오는 그날 분명히 새로운 음성을 들었습니다. 인류가 긴 세월을 겪어오는 동안 내로라하는 많은 사람들의 소리가 울려퍼지며 사람들의 귓전을 스치기도 했지만, 그날 삭개오의 마음에 들린 소리는 그와 달랐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받아 이 땅위에 오신 하나님 아들의 음성이 이 사람의 귀에 들어간 것입니다.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마 13:16) 예수님이 직접 들려주신 이 말씀처럼 삭개오는 직접 보고 듣고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 인간의 몸을 쓰고 오신 하나님의 음성이 삭개오에게 들어간 것입니다.
삭개오는 자기 수고로 나무에 올라가고 있었지만, 그의 수고와는 상관없이 예수님께서 먼저 그를 우러러보셨습니다. 삭개오가 자기 이름도 밝히기 전에, 예수께서 그를 먼저 발견하셨습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이 사람을 위해서 독생자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 독생자께서 직접 “삭개오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삭개오의 마음은 무척 흥분되고, 반갑고, 자기 집에까지 와주신다니 얼마나 감사한지 몰랐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순서로 보면 종교적인 방법과 완전히 뒤바뀐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에 대해서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는 말도 없고,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고민으로 통곡했다는 말도 없습니다. 또 예수를 보기 전에 성전에 가서 울고불고 한 것도 아니고, 자기의 마음을 씻어보려고 애쓴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려고 한 적이 전혀 없었습니다. 일반 사회에서 직장 생활하고 살아가면서, 혹시 잘못했을 때 남들에게 비난을 받으면서도, 양심에 자기는 남의 것을 도둑질했는지 안했는지도 몰랐습니다. 남의 돈을 떼먹었는지 안 떼먹었는지도 모르고, 자기 처세술대로 자기 방법대로만 살아온 사람입니다. 감히 자신에게 충고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움직이는 사람이라는 어떤 표현도 없지만, 인간으로서 그냥 살아가다가 예수를 뵈었을 때, 예수께서 자기를 먼저 사랑해 주셨고, 자기를 먼저 택하시고 자기에게 와 주신 사실에 이 사람은 굉장히 감사했던 것입니다. ‘속히 내려오라’ 하니까 무척 감사해서, “날래게 뛰어나가” (합동찬송가 343장) 하는 찬송가 가사처럼 마구 뛰어내려간 것입니다.
이 사람은 자기 집에 예수를 모시고 굉장히 감사해서, 자기가 오늘까지 가지고 있던 모든 생각 속에,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들을 정돈할 생각이 생겼습니다. 이 사람은 죄의 고통이나 뉘우침을 먼저 가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셨을 때, 예수님을 받아들였을 때, 마음속에 있는 잘못된 것을 안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잘못되었구나.’ 이 사람의 마음속에 있던 자기만의 괴로움을 예수님께 토로했습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누가복음 19:8)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까 미안해서 지금까지 이러이러한 죄를 지었다고 하면서 기억하고 있는 죄를 솔직하게 다 털어놓은 것입니까? 이 사람은 예수님을 맞이한 것이, 예수님이 자기를 먼저 불러주시고 인정해 주신 것이 무척 감사했습니다. 그분을 모시고 나니 흐리멍텅하거나, 어둡거나 또 무언가 보이지 않던 환경에 빛이 비취어 확 밝아졌습니다. 마음속에 새로운 결심이 생겨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냥 주겠다고 하는, 빛에 밀려나가는 어두움의 표현이 나타난 것입니다.
자기는 돈 벌어 먹고 사는 것만 꼭 안고 생명같이 여기며 살았는데, 새로운 빛이 자신에게 비취고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 속에 임하셨을 때, 마음속에 새로운 각오가 생긴 것입니다. 장부를 살펴보다가 잘못된 것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누가복음 19:9-10)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얼마나 뜻밖의 말씀입니까.
주 예수 내가 알기 전 날 먼저 사랑했네 그 크신 사랑 나타나 내 영혼 거듭났네 (찬송가 98장)
내가 알기 전에 주께서 나를 먼저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의 빛을 보고 돌아선 사람들
또 한 사람을 소개하겠습니다. 이 사람은 유대 전통에 따라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운 철저한 율법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배운 바대로 이단을 용납해서는 안된다는 각오와 철두철미한 신앙을 지니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베냐민 지파에서 난 그는 자신의 표현에 의하면 유대 종교를 지나치게 믿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예루살렘 거리를 배회하다가 어떤 사람이 큰 소리로 설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가만히 서서 들어보니까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자기 조상 아브라함이 저 멀리 바빌로니아 땅 근처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 땅으로 옮겨서 이삭과 야곱을 낳은 이야기, 또 칠십 명의 가족들이 이집트에 내려가고, 거기서 노예 생활을 하다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끌어내시는 이야기 등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죽 설명하면서, 사람의 수고와 힘으로 성전을 짓는다는 것에 대해서도 지적했습니다. 한 사람이 돌에 맞아 죽기 직전에 용감하게 설교를 했습니다. (행 7장 참조)
구약의 역사를 설명하고 마지막에 “지극히 높으신 이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행 7:48), “너희가 나를 위해서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행 7:49) 이런 말씀까지 들면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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