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피에 의해서 건짐을 받은 사람들의 영혼은 이렇게 보호를 받고 있다, 보관되어 있다는 것을 성경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육체의 귀는 세상의 소리에 민감하고, 우리의 눈은 세상 어려움 속에 처해 세상적인 것만을 보고, 우리의 모든 상식도 세상 쪽으로 기울어져 있을지라도 우리 영혼이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을 받고 구원받은 사실이 있다면, 바로 이 말씀과 같이 되어 있다는 내용입니다. 성경은 ‘너희가 이른 곳은 여기다’ 라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빌 3:20) 는 말씀과,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눅 10:20) 는 말씀을 전부 연결지어 생각해 보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귀한 존재로 부르셨다는 성경의 약속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 세상에서 기대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본받을 것은 무엇이 있습니까? 사람들은 자연을 아름답게 보존하고 잘 가꾼다고 하지만, 오히려 손을 대는 것마다 망쳐놓기 일쑤입니다. 다 부숴놓기도 합니다. 환경이 파괴되고 자연이 파괴되어 가도 사람들은 그것이 개발이라며 좋아지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는 말 못하는 짐승이 더 잘 알 것입니다. 환경이 그렇게 파괴되어도 사람들은 파괴를 더 즐기고 있습니다. 이 성경 말씀은, 세상에서 육체가 보호받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먼저 건짐을 받고 귀한 존재로 취급을 받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한 예를 들어서 겉보기에는 옷차림도 같고, 모습도 같고, 나이도 비슷하고, 똑같은 위치에 있는 젊은이들 여럿이 모여 있다고 합시다. 그중에 군대에서 잠깐 휴가 나온 사람이 있다면 군대 이야기를 하면 서로 통할 것입니다. 직장인이라면 직장 이야기로 통할 것입니다. 학교 이야기를 하면 서로 통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각자 속해 있는 곳에 따라 통하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인생들도 이 세상에 속한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지만, 같은 나라 사람이든 다른 나라 사람이든 그중에 하늘나라에 대한 약속과 주어진 그 영혼의 안식에 대해 같은 경험을 가진 이들이 있다면, 그들은 같은 것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돈이나 그 어떤 것으로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24절에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고 말씀하셨는데, 이 ‘뿌린 피’라는 것은 피를 어디 길거리에 뿌렸다든지 어딘가에 날려 뿜어냈다든지 하는 뜻이 아니라, 우리 양심에 뿌린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 영혼이 바로 거기에 이르러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성경은 우리가 여기에 속해 있다고 말합니다. 율법에 속한 사람들이 율법에 준한 계명을 받았을 때, 무섭고 떨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육체적으로 그것을 보고, 두려움을 느끼고 무서워했습니다. 반면에 율법을 떠나서 보면, 우리가 이른 곳은 시온 산입니다.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입니다.
새 예루살렘 복된 집 네 이름 높도다 이 수고 언제 그치고 나 거기 가리까 나 거기 가리까
저 보석으로 세운 성 늘 보고 싶도다그 진주문과 황금길 나 언제 보리까 나 언제 보리까
그 사도들과 성도들 주 예수 모셨네주 예수 믿는 친구들 쉬 함께 모이세 쉬 함께 모이세
새 예루살렘 복된 집 나 언제 가리까나 언제 수고 그치고 그 영광 누릴까 그 영광 누릴까 (찬송가 22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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