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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 세상을 이기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

-히브리서 강해 중에서 2005년 4월 23일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야고보서 4:4-5)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라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히브리서 12:14-16)
 
 
 
이 말씀은 우리 삶에서 상당히 행하기 어려운 부분들을 지적해 놓았습니다. 14절 내용을 봅시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이 말씀을 보면 상당히 겁이 납니다. 모든 사람과 화평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모든 사람과 조금도 막히지 않고 잘 지내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다 화평하며 지내지는 못합니다. 살다 보면 다른 사람과 이런 저런 일로 부딪치기도 하고, 또 오해하거나 서로 다툼도 있을 수 있고, 용납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일도 있습니다. 성경을 가까이하다 보면 성경에 있는 어려운 문제들이 우리 앞에 놓이는 일이 많습니다. 방금 읽은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하신 이 말씀도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할 수 있을까요?
 
 
제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자면, 제게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처벌하시겠지’ 라고 생각하면서도 용납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가면서 그 사람들과는 헤어졌습니다. 결국 저는 그들과 화평하지 못했습니다.
 
 
1980년대 초의 일입니다. 한 자매가 결혼할 사람을 제게 소개한 적이 있었습니다. 참 괜찮은 외모를 가진 자매였는데, 저에게 와서 자신의 지난 이야기를 다 했습니다. 그 자매에게는 과거에 다른 애인이 있었습니다. 이 애인은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이 자매를 많이 괴롭혔고, 그 때문에 이 자매는 소위 과거가 있는 여자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결혼할 형제는 모든 것을 용납하고 결혼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과거의 남자는 너무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을 사귀는 문제에서도 그렇고, 사귀는 과정에서 일을 처리하는 것도 그렇고 모든 것이 악했습니다. 그때는 우리도 젊었으니까 ‘그리스도인은 사랑으로 용납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그렇게 악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훗날 그 사람은 어떤 일 중에 나타나서 있지도 않은 일에 대해서 거짓 증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아직도 저는 그 사람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찬송가를 부르고, 성경을 읽고, 교제를 가지지만 이것이 천사들의 모임은 아닙니다. 살다 보면 육신의 냄새가 그대로 묻어나고, 인간적인 면이 드러나고, 옛 성품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또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갈 2:4) 고 하신 말씀대로 거짓 형제가 드러나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과연 모든 사람과 화평할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는 그렇게 할 수 없는 일이 많습니다. 문제는 내가 어떤 사람과 화평하게 지내야 된다는 그 자체냐 아니면 하나님의 힘에 의해서 용납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계기로 다 포용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A라는 사람이 B와 다툰 후에 서로 연락도 하지 않고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음이 변해서 이제 용납했다는 것을 알리러 갔을 때 그 사람은 벌써 다른 데로 떠나서 만나지 못했다고 합시다. 그러나 상대방을 꼭 만나서 용납한 사실을 알려서 해결했기 때문에 화평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A가 B를 용납했다는 것을 B에게 알리지 못했더라도 A의 마음에서는 이미 화평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찬송가를 부를 때도 그렇습니다.
 
 
 
지극히 화평한 맘으로 찬송을 부름은어린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찬송가 189장)
 
 
 
하나님의 사랑이 내 마음을 지배했을 때 어떠한 것이든 용납할 수 있는 근본적인 힘을 가지게 됩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인간 자체의 성격이라든가 의지, 지능이나 요령같은 것들은 정돈될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예를 들면 꼭 해야 할 말도 잠시 마음에 담아 두었다가 적절한 시기에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런 것들을 지혜롭게 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좋은 말이라고 함부로 마구 했다가 상대방에게 통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또 지나치게 참고 참아서 서로가 통하지 않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세상 일은 그렇습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룩함을 좇으라”는 말씀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너 구원받았느냐?” 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으면 “구원받았지. 구원받은 간증도 있고....” 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거룩합니까?”라고 물으면, 먹다가 무언가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해합니다. 스스로 거룩하다고 자부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찬송가를 부를 때는 만사를 잊어버리고 우리 스스로 거룩해져 있습니다.
 
 
 
거룩한 백성이 되었으니 이 육신 장막을 벗을 때도겁날 것 없겠네  (찬송가 194장)
 
 
 
찬송가를 부를 때는 스스로 ‘거룩’해져서 붕붕 떠 있습니다. 우리의 현실과 완전히 달라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보면 “거룩한 형제들아” (히 3:1) 라고 하신 대로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해주셨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거룩하게 해주신 분과 거룩하게 함을 입은 사람들, 그것은 하나님의 힘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따라가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우리 개개인의 행동을 살펴보면 그렇게 거룩하게 사는 삶이 아닙니다. 아무리 남을 잘 용납하고 사랑한다 해도, 사람의 속에는 우월감 같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경계하고, 자기에게 학식이나 지식이 있으면 그렇지 않은 사람을 얕봅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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