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죽은 행실을 회개한다고 했는데, 죽은 자가 무슨 행실이 있습니까? 여기서 죽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과거에 속했던 옛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하는 말씀에서 말하는 ‘이전 것’, 구원받기 전에 하던 행동이 “죽은 행실”입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 엡 2:1 라는 말씀에서처럼 죽었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이 범죄했으니 그 후에 태어난 모든 인생은 하나님을 믿든 믿지 않든 아담의 후손입니다. 성경은 예수 안에서 새 생명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을 죽은 사람으로 간주합니다. 그리고 새 사람으로 거듭났을지라도 옛 사람 때에 하던 행동을 하면 그것이 죽은 행실이라고 지적합니다.
아담 자손으로 태어나기만 하고 죽어 있는 상태, 허물과 죄로 죽은 사람들은 아직 산 적이 없기 때문에, 새 생명으로 인해서 거듭난 적이 없기 때문에 이 말씀에서 제외됩니다. 새로 거듭났다고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확실히 거듭났다면, 확실히 구원받았다면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라고 하면서 이 말을 한 것입니다.
죽은 행실을 회개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종교적인 뉘우침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하나님 앞에 옛 사람을 벗고 한순간에 돌아서는 것인데, 자백인지 회개인지 구별하지 못하고 계속 종교적인 행위를 반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0년 전에 ‘주여, 이 죄인을 용서하소서.’ 했는데 지금도 ‘주여, 이 죄인을 용서하소서.’ 하는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할 자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죽어 있는 상태인 죄인은 죄를 용서해 달라는 말로는 통하지 않습니다. 애를 써서 오만가지 죄를 다 토설해도 양심에 죄가 또 남아 있기 때문에 조금 있으면 다시 괴롭습니다. 인간은 자기 죄를 기억하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오만 가지 죄가 있다면 그중에 만 가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면 어떻게 용서가 되겠습니까?
‘내 죄가 영원히 용서되었구나. 하나님께로부터 죄를 사함받았구나. 지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구나.’ 하는 경험이 확실하게 있는 사람에게는 생활 속에서 묻어 들어온 죄를 언제든지 자백할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거듭난 적이 없는 사람, 죄를 사함받았다는 확신이 없는 사람은 죽는 날까지 입으로 죄를 토설하고 뉘우쳐도 안 됩니다. 죄인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한 번 용서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아야 합니다.
아들이 자기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하게 지내다가 다 잃고 ‘내 아버지 집에는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차라리 아버지께 가서 품꾼의 하나로 받아 달라고 해야겠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돌아섰습니다. 그렇게 돌아가 아버지의 품에 안겼습니다. ‘내가 집을 떠난 뒤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조차 먹지 못하고 어떻게 지냈다.’ 할 겨를도 없이 이미 아버지 품에서 다 용서가 되었습니다. 눅 15:11-32 참조
주 예수 품 찾아와서 그 품속에 잘 쉬어라
그 품속에 잘 쉬어라
이와 같이 그 사람은 아버지께로 돌아왔습니다.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죄 짐을 지고서 곤하거든 네 맘속에 주 영접하며
우리 마음속의 죄는 캄캄한 밤과 같고, 우뚝 선 나무의 그림자와 같고, 집과 바위 뒤에 생기는 그늘과 같습니다. 전부 캄캄한 것뿐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 예수의 빛이 비추었을 때에는 모든 죄가 사라집니다. “내 모든 죄 사함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하고 찬송가를 부르듯이 마음에 안고 있던 모든 것이 눈 녹듯이 사라집니다.
그렇게 죄를 사함받은 사람에게는 생활 중에 묻어 들어오는 죄를 자백할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 종교적인 생활을 하던 때에 꽉 막힌 담과 같았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빌던 습관을 이제는 버리라는 것입니다. 확실히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그렇게 하라는 말입니다.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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