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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히브리서를 생각하며 23회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히브리서 6:1-12
2004. 8. 21. 강연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히브리서 6:1-12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히브리서 6장 1절부터 8절까지의 내용은 교리적인 내용을 상당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먼저 “도의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 데 나아가라.” 1-2절 참조 라고 강하게 부탁했는데, 9절부터 12절까지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또 어떻게 본을 보여야 하는가에 대한 내용이 이어집니다. 우리는 이 내용을 우리 삶과 비교하며 읽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6장 1절부터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1-2절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린다고 했는데, 여기서 버린다는 것은 내버린다, 팽개친다는 뜻이 아니라 전진한다는 말입니다. 계단을 올라갈 때 첫째 계단, 둘째 계단을 딛고 올라가는데 먼저 것은 이미 지나가고 넘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죽은 행실을 회개한다고 했는데, 죽은 자가 무슨 행실이 있습니까? 여기서 죽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과거에 속했던 옛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하는 말씀에서 말하는 ‘이전 것’, 구원받기 전에 하던 행동이 “죽은 행실”입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 엡 2:1 라는 말씀에서처럼 죽었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이 범죄했으니 그 후에 태어난 모든 인생은 하나님을 믿든 믿지 않든 아담의 후손입니다. 성경은 예수 안에서 새 생명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을 죽은 사람으로 간주합니다. 그리고 새 사람으로 거듭났을지라도 옛 사람 때에 하던 행동을 하면 그것이 죽은 행실이라고 지적합니다. 
아담 자손으로 태어나기만 하고 죽어 있는 상태, 허물과 죄로 죽은 사람들은 아직 산 적이 없기 때문에, 새 생명으로 인해서 거듭난 적이 없기 때문에 이 말씀에서 제외됩니다. 새로 거듭났다고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확실히 거듭났다면, 확실히 구원받았다면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라고 하면서 이 말을 한 것입니다. 
죽은 행실을 회개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종교적인 뉘우침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하나님 앞에 옛 사람을 벗고 한순간에 돌아서는 것인데, 자백인지 회개인지 구별하지 못하고 계속 종교적인 행위를 반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0년 전에 ‘주여, 이 죄인을 용서하소서.’ 했는데 지금도 ‘주여, 이 죄인을 용서하소서.’ 하는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할 자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죽어 있는 상태인 죄인은 죄를 용서해 달라는 말로는 통하지 않습니다. 애를 써서 오만가지 죄를 다 토설해도 양심에 죄가 또 남아 있기 때문에 조금 있으면 다시 괴롭습니다. 인간은 자기 죄를 기억하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오만 가지 죄가 있다면 그중에 만 가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면 어떻게 용서가 되겠습니까? 
‘내 죄가 영원히 용서되었구나. 하나님께로부터 죄를 사함받았구나. 지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구나.’ 하는 경험이 확실하게 있는 사람에게는 생활 속에서 묻어 들어온 죄를 언제든지 자백할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거듭난 적이 없는 사람, 죄를 사함받았다는 확신이 없는 사람은 죽는 날까지 입으로 죄를 토설하고 뉘우쳐도 안 됩니다. 죄인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한 번 용서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아야 합니다. 
아들이 자기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하게 지내다가 다 잃고 ‘내 아버지 집에는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차라리 아버지께 가서 품꾼의 하나로 받아 달라고 해야겠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돌아섰습니다. 그렇게 돌아가 아버지의 품에 안겼습니다. ‘내가 집을 떠난 뒤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조차 먹지 못하고 어떻게 지냈다.’ 할 겨를도 없이 이미 아버지 품에서 다 용서가 되었습니다. 눅 15:11-32 참조
주 예수 품 찾아와서 그 품속에 잘 쉬어라
그 품속에 잘 쉬어라
이와 같이 그 사람은 아버지께로 돌아왔습니다.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죄 짐을 지고서 곤하거든 네 맘속에 주 영접하며 
우리 마음속의 죄는 캄캄한 밤과 같고, 우뚝 선 나무의 그림자와 같고, 집과 바위 뒤에 생기는 그늘과 같습니다. 전부 캄캄한 것뿐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 예수의 빛이 비추었을 때에는 모든 죄가 사라집니다. “내 모든 죄 사함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하고 찬송가를 부르듯이 마음에 안고 있던 모든 것이 눈 녹듯이 사라집니다.
그렇게 죄를 사함받은 사람에게는 생활 중에 묻어 들어오는 죄를 자백할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 종교적인 생활을 하던 때에 꽉 막힌 담과 같았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빌던 습관을 이제는 버리라는 것입니다. 확실히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그렇게 하라는 말입니다.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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