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상상력을 표현한 것들 중에서 제가 한 가지 접근하지 못하고 있는 분야는 오선지 위에 있는 ‘콩나물 대가리’들이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 하는 순서가 뒤섞여 나타나는 아름다운 곡에 대한 것입니다. 음악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은 악보를 보면 즉시 알고, 또 그것을 이용해서 새로운 곡을 만들어냅니다. 그것을 표현하는 도구인 악기들도 상당히 많습니다. 관악기나 현악기 등 상당히 다양한 종류의 악기가 있는데, 어떤 음을 표현하는 도구로는 최고의 작품이 바로 사람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악기 소리가 아무리 좋아도 사람이 내는 소리만큼 고상한 것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합창을 하는 것을 듣다 보면, 세상에서 아무리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짐승의 소리도 그것보다 나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저는 그동안 이런 저런 악기들을 많이 보아 왔습니다. 그 가운데는 마음에 끌린 것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그랜드 피아노를 보면서, 그 모습에 제가 조금 압도당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평소에 그런 기분이 든 적은 없었습니다. 그랜드 피아노는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새로운 모델이 나와도 그 형태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랜드 피아노’라는 이름도 잘 지었지만, 그것을 만든 사람의 디자인 감각도 참 대단한 것 같습니다. 그 디자인을 한 사람의 이름은 제가 모릅니다만, 사람의 머릿속에서 어떻게 저런 것이 설계되었는지 참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바이올린도 그렇습니다. 바이올린은 어릴 때부터 상당히 제 마음을 끌었던 악기입니다. 바이올린의 디자인도 수세기를 넘나드는 디자인입니다. 바이올린은 물론 첼로도 비슷한 모양입니다만, 제 추억에서 빼놓을 수 없습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처음 들어갔을 때 그 학교 강당에는, 강당을 꽝꽝 울리던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었습니다. 나중에 서울로 전학을 갔는데, 옮겨 간 학교는 너무 작아서 교실이 두 개밖에 없었습니다. 음악시간이 되면 선생님은 조그만 바이올린을 가져오셨습니다. 참 예뻤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서운한 마음도 없지 않았습니다. 큼직한 피아노 앞에 앉아서 연주하실 줄 알았는데, 조그만 바이올린을 어깨에 걸쳐놓으시고는 노래를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때가 초등학교 1학년 2학기 때입니다.
오색은 빛난다 무대는 열린다승리의 월계관 쓰는 자 누구냐오 아름다운 나라 아름다운 사람
선생님이 노래를 부르시면 아이들도 그 노래를 따라 불렀습니다. 나무로 다닥다닥 지은 학교였는데, 지붕 위에는 그래도 기왓장이 올려졌고, 조그마한 유리들이 탁탁 끼워져 있었습니다. 그 선생님은 아침 인사도 참 재미있게 하셨습니다. 아침에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시면 아이들은 학교에 오는 동안 있었던 모든 것들을 다 잊고 동시에 모두 일어나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금수강산 삼천리 새파란 동산에이야 데야 기뻐 뛰며 노래 부르자오늘은 어린이날 우리 명절날만세 만세 우리나라 기운차게 뻗어나는 희망을 안고발걸음을 맞추어 앞으로 가자
노래를 다 부르고 나면 모두들 자리에 착 앉습니다. 하루를 시작하는 이상한 방법입니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것이 잊히지를 않습니다. 그 선생님의 모습이나 그 노래가 하나도 잊히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학교를 3학년 올라갈 때까지 다녔습니다.
그 후에 작은 피아노를 집에 사놓기도 했습니다만 악기들이 여러분이나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어떤 것을 생각나게 합니까?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세월이 가버리는 것인지, 추억 속의 어떤 것을 생각나게 하는지 조금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저에게 피아노와 바이올린, 그 두 개의 악기는 동시대(同時代)의 먼 거리, 즉 저 남쪽 대구에서 북쪽에 있는 서울과의 기억을 이어주고 있고, 그 사이에 지나간 이야기들이, 지나간 생각들이 메워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긴 세월이 지나간 후에 또 기억나는 악기는 트럼펫과 하모니카입니다. 저는 종종 혼자서 하모니카 연주를 해보기도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혀를 대어 가면서 흥청흥청 하모니카를 잘도 부는데, 저는 잘 부르지는 못하지만 음을 고르게 낼 줄은 압니다. 저는 찬송가도 불러 봤고 명곡들도 불러 봤습니다. 틀렸는지 안 틀렸는지는 모르지만 혼자 잘 부르기는 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그런 노래들을 내 호흡에 맞춰 소리를 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후로는 자동차 안에 하모니카를 하나 가지고 다녔습니다.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릴 때면 하모니카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저희 아이들이 저에게 왜 꼭 그런 종류의 노래밖에 부를 줄 모르느냐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속으로 ‘나는 그렇게 되었단다.’ 라고 대답했지만, 한편으로는 ‘너희도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6.25 전쟁 후 나라가 복구되고 건설되어 갈 때, 도시는 온통 먼지투성이였습니다. 그때 학교의 강당에서 울려 퍼지던, 교과서에 수록된 먼 나라의 노래들은 꽤 듣기 좋았습니다. 저는 음악 시간에 수업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음악 시간만 되면 저는 미술실에 가서 앉아 있었지만, 그때 아이들이 부른 노래가 제 귓가에 맴돌아, 저도 아이들을 따라 속으로 흥얼거리곤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저에게 노래가 틀렸다, 음정이 틀렸다고 하고 심지어는 음치라고도 표현하지만, 제게 있어서 그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저는 한번도 노래를 배우지 못했지만 저 나름대로 노래를 좋아했으니까 그것으로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노래나 부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지금은 가끔씩 예전 유행가 가락이 생각납니다만, 제가 스물두 살이 될 때까지 유행가는 저속한 노래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번도 유행가를 입에 올려 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그렇게 판단해 버렸기 때문에 그런 노래를 부르지 않았던 것일 뿐, 그때 거리를 지나다니면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들을 들었던 것이 제 귓가에 남아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유행했던 노래들은 요즘 아무렇게나 부르는 노래들보다는 그래도 그 시대를 잘 표현했던 괜찮은 노래들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제가 음악시간에 수업을 듣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입니다. “사라스 폰다 사라스 폰다” 하며 발성연습을 하고 있는데, 음악 선생님이 다른 아이들이 많은 데서 제게 ‘너는 음악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선생님께 ‘음악이요?’ 라고 되물었습니다. ‘음악’이라는 말 대신에 ‘성악’이라고 표현하셨으면 좋았을 텐데 음악을 하지 말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후에 자라서 생각해 보니, 그 선생님이 표현방법에 조금 미숙했던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실 음악이라고 하면 범위가 참 넓습니다. 보슬비 내리는 소리도 음악의 한 부분이고, 냇물 소리도, 낙숫물 소리도 그렇습니다. 세상의 모든 그런 소리들이 다 음악에 속한 것들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차이가 있을 것인데, 저에게 음악을 하지 말라고 표현하셨던 것입니다. 사실 그때 제 목소리가 나빴던 것은 사실입니다. 몇 년 동안 기침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에 변성기도 오기 전에 목이 완전히 가버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음악을 하지 말라고 하시니, 저는 음악 시간만 되면 혼자 슬쩍 교실을 빠져나와서 미술실로 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학교를 다니던 세월 동안 귓가에 맴돌던 노래들은 그렇게 나쁜 노래들이 아니었습니다. “고기 낚으면서 놀던 그 시절이 그립구나” 하는 그런 노래들.
한없건만 내 마음 울고 울어 그대 없는 설움에 한숨 쉬네
복도 끝에 있는 강당에서 유리창 몇 개를 거쳐 오면서 겨우 들리는 소리만 가지고 기억한 노래들입니다. 그 노래들을 아이들이 부를 때 저도 따라서 흥얼거려 본 것뿐인데, 참 좋았던 것은 그 노래들이 다 건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살아오면서, 내 세대가 지나가고 뒷 세대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를 들어보면 무언가 이상합니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다니다 보면 옆에 강도가 와서 자기를 죽일 때까지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운전하는 사람도 귀에 이어폰을 꽂고 차를 몰다가 사고가 나기도 합니다. 그런 것들을 보면 ‘노래가 사람을 잡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저 같은 사람은 제대로 읽지도 못하는 악보이지만, 그것들을 얼마나 어떻게 잘 배열하느냐에 따라서 사람의 성격을 아주 날카롭게도, 부드럽게도 만들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다고 했습니다. (딤전 4:8 참조) 그러나 우리는, 귓가에 맴도는 곡도 아이들에게 잘못 들려주면 아이가 성장해 가는 동안 그 정신세계가 겁날 정도로 변해 갈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듯이 사람들이 몰라서 손해 보는 일들이 많습니다. 제가 음표라도 제대로 볼 수 있어서 만약 곡을 짓는다면, 나름대로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드는 곡들을 지었을 것입니다. 물론 행진곡도 필요하고 경쾌한 곡도 필요합니다.
어떤 노래들은 전혀 책임감이 없는 노래들이 있습니다. 소위 ‘인간’이 -‘인간으로 살다 인간으로 죽다’ 하는 그런, ‘참 인간다운 인간이다’ 할 때 쓰는 그런 ‘인간’입니다 - 되기 위한 준비 과정에서 낙오된 인생들이 부르는 뒷골목의 소리들이 노래가 되어 마음대로 세상을 떠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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