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세상을 사는 동안 어제도 오늘 같고, 내일도 오늘 같아서 생활이 너무 수평적이라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즐겁고 좋은 일만 계속 있는 것이 좋기는 하겠지만 그러면 또 살아가는 것이 무미건조하고 무게가 없습니다. 그렇게 세상이 가는 대로, 유행대로, 다른 사람들이 사는 대로 사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니면 무언가 당차고 짜임새 있게 사는 것이 좋겠습니까?
우리는 ‘뜻밖에’라는 말을 종종 씁니다. 내가 생각도 하지 않고 상상도 하지 않았는데 뜻밖에 반가운 사람이 찾아오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니면 어제 만난 사람을 오늘 또 만나고 오늘 만난 사람을 내일도 만나는, 늘 같은 생활을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사람은 평면적인 것을 요구하지만, 때로는 무게가 있는 것을 좋아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늘 읽는 성경도 그렇습니다. 성경은 수평만 유지하는 신앙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무언가 한 차원을 높이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계실 때의 일을 생각해 봅시다. 나이 서른두셋밖에 되지 않은 예수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뜻밖의 이야기를 할 때, 사람들은 너무나 놀라 “네가 아직 오십도 못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요 8:57 라고 물었습니다. 예수의 이야기를 듣고 고대의 아브라함과 비교했습니다. 그만큼 그 시대 유대인들에게 예수의 이야기는 아주 뜻밖의 것이었습니다.
뜻밖의 일을 겪은 사람이 또 있습니다. 세리장 삭개오는 돈을 많이 모은 부자였습니다. 그에게 한 가지 부족한 점이 있다면 키가 조금 작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예수가 보고 싶어서 자기 지위도 생각하지 않고 뽕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것은 일반적인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었던 그의 삶에 새로운 무언가를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였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올려다 보시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는 급히 나무에서 내려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셨습니다. 자기를 부르시는 목소리를 듣고 마음에서 들끓는 생각들을 그냥 간직하고만 있기가 힘들 만큼 안에서부터 용솟음치는 힘이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예수님이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에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하는, 뜻밖의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그 말씀은 예수께서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 26:39 하신 말씀과 같이 인간 편의 뜻이나 생각이 아닌, 하나님 편의 뜻이 도달한 것입니다. 상상치도 못했던 일이 삭개오에게 시작되었습니다. 눅 19:1-10 참조
또 한 여인이 간음을 한 현장에서 유대 정통 율법사들에게 붙잡혀 성전으로 끌려 나왔습니다. 이 여인은 돌에 맞아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앞에 서 있던 한 유대인이 아주 뜻밖의 소리를 했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라고 한 것입니다. 그 소리를 돌에 맞아 죽게 된 여인도, 여인을 돌로 치려던 사람들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양심의 가책을 받아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이 또한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요 8:1-9 참조
또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보기만 하면 손가락질하고 형편없이 취급하기에, 동네에 자기 모습을 나타내기가 싫었던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은 볕이 쨍쨍 내리쬐는 한낮에, 사람들이 모두 쉬거나 낮잠을 자고 있을 시간에 혼자 살그머니 우물에 물을 길러 갔습니다.
그런데 우물가에 앉아 있던 웬 낯선 사나이가 물을 좀 달라고 했습니다. 여인은 너무나 놀라고 당황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을 괄시하는 유대인이 같은 사마리아인들에게조차 눈총과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고 사는 자신에게 물을 달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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