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저는 일평생 교제 안에서 자랐으면서 성경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교제가 무엇인지,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그저 소용돌이 같은 상황 속에서 신세를 한탄하며 지내다 우여곡절 끝에 거듭났고, 서른이 넘어 구원받은 한 자매와 결혼을 해 가정을 꾸리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시간들을 지금 되돌아보면, 그때 과연 내 안에 성경이 요구하는 마음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때는 어려서 그랬겠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이 성경을 내 앞에 펼쳐 놓고 생각해 보면, 내가 형제자매들과 어울리고 교제하고 함께 일했던 세월 동안 내 입에서 나온 말과 겉으로 보였던 모든 것의 뒷면에 성경이 요구하는 마음이 있었을까 하는 질문을 스스로 해 보게 됩니다.
우리는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빠르게 습득하고 교환할 수 있으며, 송금도 전화기를 이용해서 쉽게 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세상은 이처럼 복잡다단하게 변하고 있는데, 그 속에서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완전히 구별되어 살고 있느냐 하면 또 그렇지도 않습니다. 물론 우리의 영혼은 복음을 알게 된 이후로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엄격히 구분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매일 살아가는 모습과 하는 일은 결국 세상이라는, 사회라는 큰 틀 속에 섞여 있습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많은 싸움과 경쟁을 해 나갑니다. 또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복음을 전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여러 가지 많은 일들에 파묻혀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모임이 있을 때면 청소하고 정리하고 준비하는 등의 다양하고 많은 일들을 함께해 나갑니다. 그런데 그 일에 함께하는 사람들 모두가 성경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매일 기억하고 있습니까? 우리 중에 그러한 이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이스라엘의 조상들을 통해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그저 어떤 인물이 살아간 시대 상황이나 역사의 한 사건처럼 보이는 내용들을 접하게 됩니다. 그것이 지나간 옛 이야기처럼 보일 수 있지만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면 그들이 그렇게 살아갔던 이유를 성경이 반드시 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는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으로 갔고, 그곳에서 자기 아버지를 떠나보낸 후 가나안 땅에 들어왔습니다. 아브라함은 살면서 많은 일들을 겪었는데 그의 삶의 모습들 뒤에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분명하게 명령하시고 목적을 두셨던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창 22:18 하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는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3:16 참조 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살아갔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으로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에 들어갔고 그곳에 정착해서 자식을 낳았습니다. 홍해를 지나 애굽에 가기도 하고 전쟁을 치르기도 했으며, 천사를 대접하고, 우물을 파기도 했습니다. 그 한 사람의 생애 속에는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성경 전체를 통해 목적하셨던 바가 드러나 있습니다. 언젠가 세상에 메시야를 보내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의 생애 자체를 주관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또 야곱은 어떻습니까? 그는 어머니 태중에 있을 때부터 자기 형과 싸웠습니다.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가 임신 중일 때 태중에서부터 두 아이가 싸우는 것을 걱정하자 하나님께서 두 아이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창 25:21-23 참조 그렇게 쌍둥이가 태어났습니다. 이로부터 아주 오래전,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뱀에게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창 3:15 라고 말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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