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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 교회사 Ⅳ - 종교 개혁과 청교도 운동 Ⅰ

교회사 Ⅳ
종교 개혁과 청교도 운동 Ⅰ
- 독일과 스위스의 종교 개혁
 
유럽 여러 나라에서 종교 개혁이 일어나기 전에 역사적으로 중요한 세 가지 사건이 있었습니다. 먼저 중세 시대가 막을 내리고 르네상스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르네상스는 문예 부흥을 말하는데, 구체적으로는 그리스 문화의 부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문화와 예술 전반에 걸쳐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가 부흥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인본주의, 즉 인간 중심 사상이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때로부터 약 100년 후에 인본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 계몽주의 사상이 싹트게 됩니다.
1450년에는 독일에서 구텐베르크가 이동식 금속 활자를 고안해 냈습니다. 그로 인해 인쇄술이 발달하여 대량으로 책이 인쇄되면서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사람들에게 방대한 지식을 전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일은 후에 이어지는 종교 개혁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1492년에는 콜럼버스에 의해 아메리카 대륙의 존재가 유럽 사람들에게 알려졌습니다. 후에 미국은 복음의 역사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데, 우리는 이러한 사건들이 먼저 있은 후에 종교 개혁이 일어났다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
1) 거듭남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이전에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가톨릭교회를 개혁하고자 했지만, 가톨릭교회의 범주에서 벗어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공식적으로 처음 가톨릭교회에서 분리되어 가톨릭교회와 맞서 싸웠고, 이에 대한 비판을 대중에 널리 알렸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르틴 루터를 종교 개혁 운동을 시작한 최초의 인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루터는 늘 인간 존재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던 당시 가까운 곳에 큰 벼락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는데, 이 일은 그가 법대를 그만두고 수도사가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신학 공부를 마친 뒤 신학 박사가 되었고, 1512년에는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스승 요한 폰 슈타우피츠와 많은 시간을 함께했습니다.
루터는 수도사로서 모범적인 삶을 살았지만,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느꼈고, 인간을 벌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고통스러워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스승 슈타우피츠는 신약성경을 읽으라고 권했습니다.
어느 날 루터는 비텐베르크 수도원의 한 방에서 로마서 1장 17절 말씀을 묵상하던 중에 10년 동안 찾던 해답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날의 경험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나는 밤낮으로 깊은 생각 속에서 헤매다가 마침내 이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그러자 하나님의 의에 대해 이해되기 시작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라고 기록된 것같이, 의인은 하나님의 은혜,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었다. 이렇게 열린 문을 통해 나는 낙원에 들어갔다.
그 후 성경 전체가 나에게 완전히 다르게 보였다. 예전에 내가 너무 싫어했던 ‘하나님의 의’라는 말을 이제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사랑하는 말로 붙잡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드리는 루터의 확실한 구원 간증이었습니다.
2) 95개 조 반박문
루터는 성경보다 더 권위 있는 것은 없다고 믿었기에, 당시 지배적이었던 스콜라 신학을 성경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로 반대했습니다. 그리고 중세 시대부터 이어져 온 면벌부 판매의 관행에 반대하는 95개 조 반박문을 적었습니다. 그는 반박문을 기록할 때까지만 해도 가톨릭교회나 교황을 비판하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면벌부 판매에 대한 문제점을 공론화했습니다.
당시 가톨릭교회의 교리에 따르면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가벼운 죄를 없애기 위해 연옥에 갑니다. 그곳에서 일시적으로 벌을 받는데, 교회에서 면벌부를 구매하면 연옥에서 머무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가톨릭교회에서 판매했던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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