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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 교회사 Ⅲ - 중세 시대

교회사 Ⅲ
중세 시대
일반적으로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5세기부터 르네상스 이전까지를 중세 시대라고 합니다. 중세 이전까지는 그리스와 로마 문화의 영향을 받은 인본주의(人本主義)가 발달했으나 이 시기에는 기독교가 널리 퍼지면서 신본주의(神本主義) 사상이 대두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르네상스(Renaissance)라고 하는 문예 부흥 운동이 일어나 다시 인본주의 사상으로 돌아가기까지 약 천 년간 지속되었습니다. 이 시대에는 인간의 본성을 억누르는 종교적인 교리가 강요되어 학문과 예술의 발달이 더디게 진행되거나 오히려 쇠퇴했습니다. 그로 인해 이 시기를 두고 ‘중세 암흑기’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중세 시대의 주요 흐름
1) 교황 제도
이 시기의 대표적인 제도가 교황 제도입니다. 로마는 제국 내의 큰 도시마다 교회의 감독을 두었는데, 로마 제국의 수도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겨진 후에는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네 곳의 감독이 총대주교로 임명되어 큰 권한을 행사했습니다. 그리고 440년에 로마 교회의 감독이 된 레오 1세가 스스로 베드로의 후계임을 공식화하면서 자신이 교회 전체에서 최고 위치임을 자처했습니다. 당시 훈족과 반달족이 로마 제국을 침략했는데, 권한이 약화된 황제가 백성들을 지키지 못하는 상황에서 레오 1세의 중재로 이민족들이 물러가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레오 1세에 대한 신뢰와 권위가 매우 커졌고, 훗날 그는 교황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의 교황에게는 교회가 세운 교리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을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고, 종교 재판을 위한 규정도 만들어졌습니다. 교회는 중세 시대 전반에 걸쳐 사람들의 실생활에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유아 세례부터 결혼식, 장례식까지 사람들의 삶과 죽음에 관련 있는 모든 행사가 교회에서 열렸습니다. 구원은 교회의 구성원에게만 허락된 개념이었고, 죄 사함과 천국의 평안은 교회의 제도를 따를 때 공인된 성직자로부터 받을 수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이 시기에 교회는 국가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중세 시대 전반에 걸쳐 국경을 초월해 영향을 미쳤던 유일한 조직이었습니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통치 기간에 전례가 없는 정치적인 권위를 가졌습니다. 그는 1198년 10월에 <만물의 창조주처럼(Sicut universitatis conditor)>이라는 라틴어로 작성된 칙령에서 국가가 교회에 예속된다는 신학적인 원리를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낮과 밤을 주관하기 위한 ‘큰 광명’과 ‘작은 광명’을 만드신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교황에게 주신 권위는 왕의 권위를 능가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당시 서유럽에는 교회에 도전할 만큼 강력한 국가나 기관이 없었기 때문에, 왕이나 황제들은 교회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14세기 초의 이탈리아는 작은 도시 국가나 공국들이 조각조각 붙어 있는 나라였고, 독일 또한 신성 로마 제국의 영광을 잃고 많은 작은 나라들로 나뉘어져 있던 탓에 황제의 권력이 상대적으로 약했습니다. 따라서 교황의 지위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해졌고, 그 권력은 더욱 중앙 집권화 되어 세계를 지배하는 황제의 권력과 같았습니다. 주교들은 교황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했고, 교황의 허락 없이는 어떠한 수도회도 설립될 수 없었습니다. 로마에서 파견된 대사들은 교황의 명령이 모든 국가에서 제대로 시행되고 있는지를 주시했습니다.
소작농부터 권력자까지 모두를 굴복시킬 수 있었던 교황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파문의 위협이었습니다. 교황의 파문 선언은 사람들을 교회로부터 강제로 분리해 낼 수 있었습니다. 파문된 사람은 판사, 배심원, 증인, 변호인으로 활동할 수 없었고, 후견인이나 유언 집행자, 계약 당사자도 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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