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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 우리를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

우리를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
2007. 12. 24. 강연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고린도후서 5:19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우리는 함께 설교를 듣고 성경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여러 활동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그러한 사귐을 갖습니까? 혹시 각자 말씀을 뒷전에 두고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저런 것을 다 잃고 어려운 상황에 있다 해도 우리에게는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또 우리는 종종 세계 여러 지역에서 복음이 전해지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두고 서로 대화를 하고 있습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교제 가운데서 진행되는 다양한 활동들 속에서 많은 형제자매들이 마음이 회복되고 생활이 정리되어 가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께 허락받은 양심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곁길로 가거나 마음이 흐트러질 때 그 마음을 강하게 붙잡아 줄 수 있는 것은 결국 복음을 전한다는 사명입니다. 우리는 그 사명을 한 번씩 마음에 되새겨야 합니다.
제가 성경을 전하는 사람이기에 여러분들은 저를 보실 때 항상 복음을 위해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불타는 사람으로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저도 똑같은 사람입니다. 바쁘게 일하다 보면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에서 마음이 멀어지기도 하고, 생각이 해이해지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성경을 읽어 가며 제 마음을 추스르고는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복음이, 해외 선교가, 교제가 입에만 머무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을 살다가 어느 날 내 양심 깊은 곳에서 일어났던 그 변화를 한번 생각해 보고, 그 변화를 일으켜 주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마음으로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음을 택하셨는지, 또 그 죽음이 우리 삶 속에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나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들려주고 있는지 생각해 본 적 있습니까? 그 사명에 대해서 기억하고 되새기며 다가오는 새해를 다짐하는 시간이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교제 안에서 일을 맡아 바쁘게 지내는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는 차원이 낮은 신앙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신앙의 기초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차원 높은 여러 가지 일들을 하면서 살고 있는데, 그런 것을 누가 모르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마 25:21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어느 날 우리 개개인들의 마음속에 생명의 말씀이 심어진 이후 지금까지 지내 오는 동안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것이며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 세미하게 들리는 그 목소리는 내 삶에 엄청난 위력을 가할 수 있고, 내 삶 전체를 흔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사실을 인정한다면 복음을 위해서 내가 어떤 마음으로 지냈는지를 생각하며 마음 밭을 갈고 또 갈아야 합니다.
오늘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크리스마스 전날입니다. 오늘 같은 날은 대도시의 술 소비량이 최고로 많은 광란의 밤이 됩니다. 곳곳에서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많은 죄악이 들끓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때에 우리는 우리가 기본적으로 들어서 다 아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크리스마스가 되면 으레 “기쁘다 구주 오셨네” 찬송가 115장 하고 부르고, “아기 잘도 잔다” 찬송가 109장 하고 찬송가를 부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태어나시기 약 7백 년도 더 전에 기록된 이사야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9:6-7
서두에 “이는”이라고 했습니다. 앞에 무언가 전제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앞에는 어떤 말씀이 있는지 보겠습니다.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케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같이 그들이 주의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이는 그들의 무겁게 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의 갑옷과 피 묻은 복장이 불에 섶같이 살라지리니  이사야 9:1-5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한 내용은 마태복음을 보면 더 자세히 나타나 있습니다. 4:14-16 참조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라고 했고,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케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는 그들의 무겁게 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되”라고 했습니다. 이 짧은 내용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태어나셨던 땅, 바로 이스라엘에서 천하만국을 통치하시게 될 과정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과거의 일과 이후에 일어날 미래의 일까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내용 다음에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하는 표현이 이어집니다. 한국어 성경에는 이 부분이 과거에 있었던 일로 서술되어 있는데, 영어 성경에는 ‘이 아이가 나 있다. 그 아들이 주어져 있다.’라는 의미의 현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한국어로 읽을 때와는 어감이 다릅니다. 또 한국어로는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라고 되어 있는데, 영어로는 ‘그 어깨에 이 정권이 얹어질 것이다.’라는 미래형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사 9:6 참조 말 표현에 차이가 있습니다.
이 글을 쓴 선지자의 입장에서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날 것이며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될 것이며’라고 해야 맞습니다. 이때로부터 약 7백 년 후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하고 과거형으로 서술했습니다.
저는 이러한 말씀을 볼 때마다 우리에게 주어진 구약성경의 힘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됩니다. 신약성경이 수학 공식의 답 같은 것이라면, 구약성경은 그 답에 대한 질문, 그 답이 나와야 할 이유에 대해 서술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볼 때 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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