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라고 했는데,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을 때까지의 이야기, 이삭이 야곱을 낳을 때까지의 이야기, 야곱이 열두 아들을 낳은 이야기, 70명의 대가족을 이룬 야곱과 열두 아들이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 애굽에서 살게 되는 이야기가 창세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다음 출애굽기에는 그 민족이 애굽에서 나오는 광경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한 말씀처럼, 야곱 자손이 열두 아들을 통해 이스라엘 역사를 이어 왔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시기 천 년 전의 사람입니다. 이런 내용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구약성경의 상당히 많은 부분이 마태복음에 설명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 1절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라고 되어 있고, 그 뒤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 열두 아들을 낳았고, 또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하나하나의 이야기가 창세기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이 세상에서 각 나라에 속해 있습니다. 저는 한국 사람입니다. 유대인들은 어떻습니까? 유대인의 조상은 지금의 아랍 지역인 이라크의 갈대아 우르에서 차츰차츰 서쪽으로 옮겨 가 가나안 땅에 산 아브라함입니다. 그렇다면 유대인의 원 조상은 아람 사람이고, 그들은 이라크, 옛날 바벨론 땅에 살던 사람들입니다. 유대인의 혈통을 살펴보면 원래는 이라크 쪽 사람인 것입니다.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나라는 중국과 접해 있으면서도 한국 사람의 조상이 중국 사람의 조상과 다르다고 말합니다. 일본 사람도 자기들 조상은 별개라고 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원 조상에 대해 이스라엘 땅에서 태어난 대단하고 특별한 존재로 과대 포장하지 않고, 바벨론 땅의 아람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참 희한한 일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하는 이들이 절대 양보하지 않고 철통같이 주장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민족 속에 섞여 살면서도 자신들만의 법을 따랐습니다. 바로 모세오경입니다. 물론 탈무드 같은 책도 있기는 하지만, 유대인들에게는 구약성경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구약성경을 통해 자신들에게 말씀해 주셨다고 합니다. 전 세계 어느 민족도 그런 주장을 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땅의 예루살렘을 비롯한 여러 도시에는 옛날부터 대대로 아랍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세계로 흩어졌다가 1948년 이후에 이스라엘 땅으로 되돌아 와서 아랍 사람들에게서 조금씩 조금씩 땅을 사들였고, 이웃으로 같이 지내다가, 결국 그 땅을 차지했습니다. 아랍 사람들은 자기가 살던 곳을 비우고 떠나야 될 형편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옛날 자기 조상들이 살던 땅을 절대로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옛 조상들도 다른 민족에게 땅을 양보하거나 판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2천 년이라는 세월 동안 유랑 생활을 했어도 자기들의 땅에 돌아가서는 그 땅을 점차 사들이거나 차지해 나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 땅이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주신 땅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랍 사람들은 또 어떻습니까? 그들은 유대인들을 아주 싫어합니다. 아랍 사람들 중 블레셋이라고 불리던 팔레스타인의 원주민들은 유대인들을 몹시 싫어합니다. 현재 중동의 불씨는 바로 아랍 사람들과 유대인들 간의 마찰입니다. 거기에는 평화가 있을 듯하면서도 끝없는 전쟁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연일 폭탄 테러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그런 이스라엘 땅을 배경으로 한 구약성경에 나타난 많은 예언들이 어느 한 인물을 지목했습니다. 저는 옛날에, ‘나는 유대인도 아니고 한국 사람인데, 유대인들이 읽는 성경을 꼭 가까이해야 될까?’ 하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의 일인데, 어떻게 내가 성경을 가까이하게 되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참 신기합니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제가 참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저는 성격으로나 소질이나 취미로나 그 어떤 이유로든 성경과 가까워질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성경을 몹시 싫어했습니다. 그저 성경에 대한 몇 가지 이야기를 주섬주섬 주워들은 정도였을 뿐이지 성경이 내게 가까운 책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 헤어졌으나 어머님의 무릎 위에 앉아서” 찬송가 234장 하는 찬송가를 들어도, 어머니가 강조하는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제게 전혀 맞지 않았습니다. 종교인이 되는 습관 자체가 싫었습니다. 부모님이 교회에 열심이셔서 따라가기는 했지만 제가 마음이 내켜서 예수를 믿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달라졌습니다.
왜 내게 굳센 믿음과 또 복음 주셔서 …
주 예수 믿게 하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이 찬송가 가사대로입니다. 이 찬송가를 부르면 ‘정말 그렇다.’ 하는 마음이 됩니다. 왜 내가 예수를 믿게 되었는지, 어떻게 내가 성경을 사랑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하면 참 아찔합니다. 저는 성경에서 영 멀어질 수 있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2장에 “사거리 길에 가서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모두 데려오라 하니 손이 가득한지라” 9-10절 참조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복음이 전해진 지 2천 년이 지나는 동안, 저 역시도 사거리 길에서 아무나 데려온 가운데 어쩌다 붙들려 들어온 사람 중 하나입니다.
제가 스물두 살 때의 일입니다. 그때 저는 자신들이 택함받은 백성이라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이 믿는 종교를 굳이 내가 믿어야 될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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