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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3> 이스라엘의 옛날과 오늘과 내일을 보라

-1998 북미지역 성경탐구모임 7월 20일 오후
 
 
불안한 시대인 만큼 사는 목적이 분명해야
 
 
우리가 사람들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찬송을 할 때 먼저 찾아보아야 될 성경이 고린도전서 13장입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1절)
 
 
 
그런 후에, 같은 찬송가라도 가사를 한 번 더 주목하고 불러 봅시다.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 나의 생명이 되신 주밤낮 불러서 찬송을 드려도 늘 아쉰 마음뿐일세
나의 사모하는 선한 목자는 어느 꽃다운 동산에양의 무리와 늘 함께 가셔서 기쁨을 함께 하실까
길도 없이 거친 넓은 들에서 갈 길 못 찾아 애쓰며이리 저리로 헤매는 내 모양 저 원수 조롱하도다
주의 자비롭고 화평한 얼굴 모든 천사도 반기며주의 놀라운 진리의 말씀에 천지가 화답하도다
나의 진정 사모하는 예수여 음성조차도 반갑고나의 생명과 나의 참 소망은 오직 주 예수뿐일세 (찬송가 82장)
 
 
이 찬송가대로, 우리의 삶 속에 진정 나의 생명이 무엇이냐고 누가 묻는다면 “나의 생명과 나의 참 소망은 주 예수뿐일세” 라고 답하는 것이 제일 자랑스러울 것입니다. 이 지구상에 사는 사람들에게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사는지 가르쳐 주는 학문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고, 왜 살아야 되는지 이야기를 해 주는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학교에서도 그 답을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서부터 죽는 순간까지 여행을 합니다. 지구라는 버스는 이 긴 여행길을 언제까지 돌아갈지 모르지만, 수십억 명씩 싣고 돌아가고 있습니다. 중간에 하차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에 비례해서 또 계속 태어납니다.
 
 
그런데 이 지구가 가는 길이 있습니다. 이것을 지구의 궤도라고 합니다. 또 지구의 나이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지구 위에서 피곤에 지쳐 있습니다. 이곳에서 저곳까지 비틀거리며 왕래하고 있습니다. 젊은이나 늙은이나 남자나 여자나 할 것 없이 무엇 때문에 이 지구 위에 실려 가는지 알지 못하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그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 (아모스 8:12-13)
 
 
 
인생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무엇 때문에 사는지 알지 못한 채 피곤하게 살아갑니다. 이것은 돈이 있고 없고, 몸이 건강하고 병약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7, 80년 살다가 마치는 이 육체 속에 있는 영혼에는 참 생명이 필요합니다. 우리 영혼 속에 참된 생명이 주어져야 되고, 이미 그 생명이 주어진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정신을 차려야 됩니다. 사람들은 천 년, 만 년 살 것같이 노력하지만, 이 지구의 연대가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그 옛날 사도 베드로가 하나님께 받아 말한 내용 중에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벧후 3:12)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자들이 만들어 놓은 가공할 무기들의 최후입니다. 우리는 이 앞에서 어떻게 해야 되느냐, 덧없이 살다가 마쳐야 되느냐? 나같이 그런 것에 민감한 사람이 만약 성경을 몰랐다면, 성경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 위에 내 마음이 서지 않았다면 얼마나 불안하겠느냐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으로서는 이 날을 어떻게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성경을 통해서 영혼이 완전히 변해 있으면 어떤 두려움과 괴로움이 올지라도 그것을 이기는 힘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저 공중에 구름이 일어나며 큰 나팔이 울려날 때주 오셔서 세상을 심판해도 나의 영혼은 겁 없겠네 (찬송가 470장)
 
 
 
요즘은 예측불허의 기후 변동이 많이 일어납니다. 지구 위에 언제 어떤 천재지변이 닥칠지 모릅니다. 평온하게 잘 살던 사람들이 태풍에 휘말려 사라져 버리는가 하면, 갑작스런 홍수에 쓸려 내려가 버리고, 지진으로 흔적 없이 땅 속에 묻히는가 하면, 아침 잘 먹고 출근하다가 교각이 뚝 떨어져 내려서 가 버리는, 이러한 불안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아마 이런 세상에서 직위가 있고, 사회적인 책임을 많이 지고 있고, 형편이 좋으면 좋을수록 걱정이 더 많을 것입니다.
 
 
영혼의 문제부터 해결하라
 
 
여기에서 우리가 깊이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목적이 무엇일까요?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 20:31)
 
 
 
이 ‘생명’은 부모님 대에서부터 물려받은 육체의 숨 쉬는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생명을 우리 인간에게 선사하기 위한 계획으로 기록된 것이 성경입니다. 육체는 영혼이 담겨 있는 그릇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영혼 속에 영원한 생명을 이식시키기 위해서 모든 인생을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이 영원한 생명을 각 사람이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에 따라서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와 목적을 분명히 하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로마서 8: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혼 속에 오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영’이 무엇일까요?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존되기를 원하노라  (데살로니가전서 5:23)
 
 
 
‘온 영’이라고 하면, 성령인 줄 착각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성령이 아니고 인간의 영을 말합니다. 인간의 생각이라든가 마음이 전부 다 혼에 속해 있습니다. 그러나 양심의 문제는 혼보다는 영에 가깝습니다. 모든 인류를 대표하는 하나의 성격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종교 심리, 곧 종교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이 종교성을 없앨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에이, 뭐 무신론자도 있는데’ 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무신론이라는 미신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는 양심 속에 들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종교를 피할 수 없습니다.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하는 이 ‘영(spirit)’이라는 단어는 영어 성경에 소문자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Spirit)’은 대문자로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 혼(soul), 몸(body)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영과 혼을 합쳐서 영혼이라 합니다.
 
 
사람은 아무리 법이 없는 곳에 살거나 보는 사람이 없어도 어떤 일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받습니다. 로마서에는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낸다” (2:15) 는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는 아무도 보지 않는 것 같은데도, 양심이 증거가 되어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옛날에 제가 어떤 집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마당을 들어서는데, 조그마한 아이 하나가 뛰어나오다가 저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아이고 아저씨. 제가 갖다 놓을게요.”
 
 
“뭘?”
 
 
아마 엄마 몰래 집에서 무얼 가지고 나오다가 저와 눈이 마주쳤는데 겁이 났는지 다시 집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잘못을 저지르면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어도 자기 양심이 더 잘 압니다. 바로 이 양심의 발로에 의해서 사람은 종교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어떤 형상도 만들고, 태양을 섬기고, 달을 섬기고, 거대한 바위를 섬기고, 바위로 사람같이 깎아 만들어 섬기고, 별의별 것들을 다 섬깁니다. 자신을 섬기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들은 아침마다 거울 앞에 앉아서 예배를 드립니다. 자기 얼굴을 닦고, 그리고, 지우고, 계속합니다. 좋아서 웃기도 하고, 웃다가 보면 또 주름 생길까봐 얼굴을 잡고 웃기도 합니다. 그래도 늙어가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조금 있으면 잘 보이던 것도 침침해집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눈에 맞는 안경을 하나 낍니다. 그렇게 늙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고 애를 쓰고, 그래도 치과에 몇 번 오간 흔적이 생기고, 얼굴에는 주름살이 늘어갑니다. 늙음은 어떻게 피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더욱 불쌍한 자리라  (고린도전서 15:19)
 
 
 
만약 우리 인생이 이렇게 살다 마친다면 성경에 말씀하셨듯이 모든 사람 가운데 더욱 불쌍한 자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생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성경이 기록된 목적은 우리 인생에게 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이 그러한가 한번 살펴봅시다. 만약 어느 종파에 속해 있든지 예수 믿는 일, 하나님 섬기는 일, 교회 다니는 일, 이 모든 일이 평생 우리 옆에 따르고 있다고 합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영원한 생명이 내 영혼과 함께 있지 않아서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알지 못한다고 가정합시다. 그렇다면 이 성경에 있는 모든 저주, 모든 형벌이 여러분의 기억 속에 없고, 생각 속에 없고, 그 사실을 모른다 할지라도, 혹 성령이 내 영혼과 함께 있는 것이 이루어져 있지 않다면, 여러분의 영혼은 언젠가 엄청난 두려움에 떨 것이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로마서 8:6-7)
 
 
 
육신의 생각은 사망,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는 이 차이점입니다. 뿐만 아니라 8절에는,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혹 여러분 중에 과거에 언젠가 내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 그래서 구원을 얻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이 말씀을 한 번 더 보십시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로마서 8:9)
 
 
 
여러분 스스로가 진단하시기 바랍니다. 형제자매들과의 교제 가운데 같이 섞여 있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육신에 있느냐, 영에 있느냐는 것은 분명히 한번 구분해야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어디 있느냐? 내 몸 밖에 있느냐, 내 마음 문 밖에 있느냐, 내 속에 있느냐.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문제가 확실히 해결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수명을 다해 죽기 전에 이 사실이 이루어져 있어야만 안전합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로마서 8:10-11)
 
 
 
하나님의 영이 우리 몸을 살리신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살고 싶다고 발버둥쳐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우리 속에 오셔서 계시다가 우리 몸이 죽은 후에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를 일으키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책임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그 일 하실 분을 내가 나의 구주로 확실히 모셨습니까?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앞에서 무엇이라 했습니까? 너희 몸과 혼과 영.
 
 
보통 집회나 부흥회 같은 곳에 가면 찬송가를 부릅니다.
 
 
 
성령이 오셨네 성령이 오셨네 ...이 기쁜 소식을 온 세상 전하세  (찬송가 179장)
 
 
 
과연 그렇습니까? 확실히 예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라도 이 사실 앞에 엄숙하게 한번 따져 보아야 될 책임이 있습니다. 믿는다고 하지만 성경을 봐도 잠이 오거나 깨닫지 못하는 이유들은 무엇입니까?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고린도전서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어떤 일에 있어서 내 영과 혼이 내 육신의 삶 쪽으로 가 있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성령 쪽으로 가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백인이든, 황인이든, 흑인이든 모두가 육에 속한 사람에 포함됩니다. 그 모든 인간 중에서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의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영혼이 변화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런 찬송가를 불렀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모든 죄 가운데 빠져 더럽기가 한량없던 우리들아무 공로 없이 구원함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 지금 되었네 (찬송가 206장)
 
 
 
“지금 되었네” 이 한 사실이 자기 마음속에 이루어진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사람도 살아가다 보면 육신적으로 빠져서 육에 속해버릴 수가 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이라는 말은 성령의 지배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하고 육에 빠져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될 경우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가 힘듭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세상으로 흘러가고 싶어도 못 가고 그렇다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도 못하고, 발이 이쪽에 반, 저쪽에 반, 양다리를 양쪽에 걸쳐 두고 있는 꼴입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이런 사람들을 특별히 교육한 내용이 있습니다.
 
 
 
무릇 짐승 중에 굽이 갈라져 쪽발도 되고 새김질도 하는 것은 너희가 먹을 것이니라 다만 새김질을 하거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것이니 곧 약대와 토끼와 사반, 그것들은 새김질은 하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니 너희에게 부정하고  (신명기 14:6-7)
 
 
 
말굽 모양으로 부싯돌같이 굽이 갈라져 있지 않은 짐승의 고기는 먹지 말라, 돼지는 굽은 갈라졌지만 새김질을 하지 못하므로 먹지 말라, 소는 굽도 갈라지고 새김질도 하므로 먹어도 된다고 성경에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과 분리된 삶과 말씀을 묵상할 줄 아는 것을 비유한 말씀입니다. 소는 풀을 뜯어 위에 집어넣고 하루 종일 되새김질을 합니다. 어떻습니까? 소가 꼴을 먹는 모습을 보았습니까? 풀을 뜯어먹어서 배에 가득 채워 위를 네 개나 거쳐야 되니까, 되새김질해서 또 넘깁니다. 소의 발자국을 보면 굽이 갈라져 있습니다.
 
 
 
세상으로 향하는 과거의 모든 욕망오래 전에 이미 사라졌도다  (합동찬송가 163장)
 
 
 
과거와 분리된 생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생활. 성경은 육에 속한 사람과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사람을 구별해 놓았습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고린도후서 13:5)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망령된 행실을 끊고  (찬송가 208장)
 
 
 
만약 성령의 경험이 없는 사람과, 또 성령을 모시고 있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들을 한번 더 살펴보아야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평생 두려움 속에 살기 때문입니다. 이 거룩한 믿음을 우리가 받았다면, 또 영원한 성령을 우리가 힘입었다면, 영원한 성령이 우리 마음속에 와 계신다면, 안심하고 살아도 됩니다.
 
 
그러나 아직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심히 걱정해야 될 문제입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 10:10) 는 것이 우리 영혼의 목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원이었습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들을 앞서간 성도들은 어떻게 불렀는지 한번 더듬어 봅시다.
 
 
 
왜 내게 굳센 믿음과 또 복음 주셔서내 맘이 항상 편한지 난 알 수 없도다...왜 내게 성령 주셔서 내 맘을 감동해주 예수 믿게 하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찬송가 410장)
 
 
 
얼마나 자신만만한 찬송입니까?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런 찬송가를 보통 유행가 부르는 가락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앞서간 성도들이 부른 찬송가들을 한 곡조씩 대할 때, 아무런 생각 없이 부르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하고 싶습니다. 그 찬송가들은 곡을 붙인 성도들의 기도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할 때 이마에 내 천(川)자가 그려진 표정으로 ‘주여!’ 합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의 얼굴을 카메라에 담으면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그 다음에 ‘찬송가 부릅시다’ 하면,
 
 
 
내 기도하는 한 시간 그 때가 과연 즐겁다
 
 
 
이번에는 금방 기도가 즐겁다고 합니다. 혹 반가운 분의 전화를 받거나 직접 만나면 즐겁습니까 아니면 얼굴을 찡그리게 됩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는 성경책을 앞에다 두든지, 혼자 골방에 들어갔든지, 아니면 차에 탈 때든지, 어디에서든지 ‘하나님, 당신이 내 마음을 더 잘 아십니다.’ 하는 자세면 됩니다.
 
 
많은 수의 사람이 모일 때에 날씨가 무더우면 한층 더 더위를 느끼게 됩니다. 그럴 때에 소나기라도 한줄기 내리면 더위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이 한결 시원해질 것입니다. 만일 그때 누군가가 비 좀 내려 달라고 기도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후에 비가 내렸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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