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얼마든지 그때그때 임기응변으로 말할 수 있고 필요할 때 이 말 저 말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 요지부동한, 바뀔 수 없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이 무엇인지 사람의 말이 무엇인지 잘 구별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좋은 말 많이 들었습니다.’ 하는 식으로 이야기합니다.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말씀해 주십시오.’ 하는 말들이 많이 있는데, 여기 나타난 예수의 말과 제자의 말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제자들의 말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보통 말이지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전혀 다릅니다. 의미가 다르고 뜻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이유도 다르고 근본이 다른 말씀이 제자들과의 대화 속에 있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점쟁이들이 ‘네가 앞으로 이렇게 될 것이다.’ 하고 예언하는 것 같은 그런 말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신 것은 ‘내가 네 선생이기 때문에 너를 잘 안다. 너는 반드시 나를 부인한다.’ 하는 식의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수의 입을 통해서 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인간으로서 최고의 맹세와 다짐을 했습니다. 제자 중에 수제자인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후에 실패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한 말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말을 한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하신 것은 제자들을 무시하거나 멸시하거나 배신자라고 생각해서 하신 말은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렇게 하실 수밖에 없는, 당연히 하셔야 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인간 사회에서 살며 교육을 받고 교양을 익히며 어떤 정신과 충성심 등을 갖게 되면 우리는 인간으로서 이보다 더 좋은 말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말은 그대로 두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교훈하시려 했던 말씀만 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교훈입니다.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마태복음 26:31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너희가 다 나를 배신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자기가 처한 입장을 모면하기 위해서 3년 동안 따라다니던 스승 예수를 버리고 떠나는 상태가 될 것을 지적해 주셨습니다.
이 말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죽음이라는 것이 가로놓여 있음을 말합니다. 인간은 살아서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요 14:9 이라고 하신 것은 그의 죽음으로 하나님 아들로서의 정해진 길이 열려 하나님과 인간이 바로 연결되기에, 그 순간에 대해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아직 제자들이나 예수님이나 아무도 죽음을 맛보지 않았습니다. 그 상태에서는 예수를 보아도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요 1:11 하신 말씀이 정확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마 13:16-17 라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를 보고도 예수가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한 소경은 예수를 향해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눅 18:38 하고 불렀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도 ‘다윗의 자손 예수’를 알아보았습니다. 하지만 예수의 죽음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제자들도 죽지 않았습니다.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욥 19:26 하신 그 이상의 말이 어디 있겠습니까? 육체를 가진 인간이 이 자연계를 보는 눈으로 하나님을 정말 볼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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