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 아들들은 하나님께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던 명령대로 그 아버지의 몸을 통해 태어났고, 그들 역시 같은 방법으로 씨를 유전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함은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방법대로 쓰이는 일에 대해서 쉽고 가볍게 여기고 말을 함부로 했습니다. 그래서 노아가 저주를 했는데,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라고 했습니다. 함에게는 구스, 미스라임, 붓, 그리고 가나안이라는 네 아들이 있었습니다. 노아는 함을 저주한 것이 아니라 함의 아들 가나안을 저주했습니다. 가나안의 후손들이 살던 지역이 가나안이었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저주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일이 있고 3백여 년 후에 아브라함이 들어간 가나안 땅, 곧 가나안 자손이 살던 그 땅에 가나안의 자손들만 살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섞여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땅의 이름으로 미루어 볼 때 처음에 그곳에 거주했던 사람들은 분명히 함의 아들 가나안의 자손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출애굽 후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민족을 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가나안 족속과 싸우는 이야기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계실 때 가나안 여자 하나가 예수님 앞에 와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고 외쳤던 일도 있습니다.
그 가나안 땅이 지금의 이스라엘 땅입니다. 창세기 10장 15절부터는 가나안의 족보가 나타나 있습니다. 그들은 북쪽 시돈에서부터 시작해서 동쪽으로는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남쪽으로는 현재 이스라엘과 비슷한 지역에 자리 잡고 살았습니다. 창세기 11장 끝부분에는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등장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먼 곳에서부터 이 가나안 땅으로 불러들이셨습니다. 아주 멀리 사는 나그네와 같은 사람을 바로 그 저주받은 땅에 불러들이신 것입니다. 혼돈하고 공허한 땅에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셨던 것과 내용이 비슷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창 12:1 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조상이자 모든 믿는 자와 모든 의인의 조상이 되는 아브라함이 그 명령대로 저주받은 땅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이와 비슷한 모습이 출애굽기에 또 한 번 나타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의 노예가 되어 살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숫자가 많아지자 애굽 왕은 이스라엘 사람에게서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전부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 와중에 레위 지파 사람에게서 한 남자아이가 태어났고, 부모는 아이를 숨겨 기르다가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결국 바구니에 넣어 하숫가에 두었습니다. 그 아이를 애굽의 공주, 바로의 딸이 발견해서 키웠습니다. 그 아이는 애굽의 최고 지도층인 왕족들이 사는 궁전 안에서, 유모가 된 친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랐습니다. 이스라엘을 노예 취급하던 원수 애굽의 중심부에서 이스라엘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누구입니까? 바로 모세입니다.
또 꼭 그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민족이 로마 제국에 완전히 짓밟히고 있을 때, 이스라엘 땅에서 아무도 모르게 어느 여인의 몸속에서 한 아이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경을 처음부터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빙 둘러가는 방법을 쓰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은밀히, 조용히 진행하시지만, 그 일을 하시는 방법이 매우 예리하고 정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이나 어떤 힘들은 그것을 감지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던 때에 수면에 운행하시며 “빛이 있으라” 하셨습니다. 창 1:2-3 참조 하지만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했던 것과 같습니다. 요 1:5 참조
또 아브라함은 자기 가족만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성경을 보면 그 당시에는 아브라함이 가나안 사람들과 부딪쳤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그가 애굽을 다녀온 후부터 그 지경 사람들과 조금씩 마찰이 시작되었습니다. 언젠가 애굽의 노예들을 전부 해방시켜 애굽의 최고 적수이자 원수가 될 모세가 애굽 궁전에서 자라고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도 그 모습 그대로 한 여자의 몸속에서 자라나셨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는 거듭나는 경험조차도 이와 상당히 닮았습니다. 한 사람이 거듭날 때 옆에 있는 사람은, 그 마음속에 아주 날카로운 칼이 파고들듯이 일어나고 있는 일을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합니다. 그것은 자신만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은 히브리서 4장의 내용과 굉장히 닮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2절
함이 아버지 하체를 보아 그 형제들에게 고하고, 함의 아들인 가나안이 저주받은 것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고후 4:6 하셨던 하나님께서 같은 방법대로 계속 일을 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전 1:9 하는 말씀들이 이스라엘 역사를 두고 하는 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명령
창세기 10장 후반부에는 셈의 계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후손 중에 에벨이라는 아들이 있는데, 그에게는 벨렉과 욕단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26절부터의 내용은 그 두 아들 중에 욕단의 자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10장 전체는 노아의 세 아들을 통해서 일어나는 자손들에 대한 내용인데, 이스라엘과 별로 관계없는 이야기만 나옵니다. 창세기 10장에는 아주 인간적인 계보가 지나갑니다.
그런데 11장에 가서 걸리게 됩니다. 성경의 서술하는 순서나 방법은 상당히 치밀하게 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11장에는 바벨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셨지만, 이들은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며 하나님의 뜻과 반대로 탑을 쌓으면서 하늘을 향해 올라가다가 결국 그대로 주저앉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돌도 아니고 흙을 구워 만든 벽돌로 탑을 쌓았습니다. 바로 흙으로 지어진 사람이 사람의 뜻으로 이루어 가는 인간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 탑에서 벌어지는 일이 성경에 한 번 나타난 후에, 또다시 셈의 계보가 나타납니다. 11장 10절에 “셈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하는 말씀이 있고, 셈으로부터 아홉 세대가 지났을 때 아브라함이 태어납니다. 그런데 창세기에는 아홉 세대로 되어 있는데, 누가복음을 보면 한 세대가 더 있습니다. 열 세대입니다. 창세기에는 셈 다음에 아르박삿, 아르박삿 다음에 셀라로 기록되어 있는데, 누가복음에는 가이난이라는 사람이 아르박삿 다음에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눅 3:36 참조 성경을 읽다 보면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족보에서 빼시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을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후손들 중 벨렉이라는 사람 시대에 땅이 갈라지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몇 세대 후에 데라가 태어났습니다. 데라는 바벨론 동남쪽의 우르라는 도시에서 살고 있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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