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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복음서를 읽으면서 87회
마태복음 22:1-14
2002. 12. 07. 강연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마태복음 22:1-14
천국을 향해 살고 있는 유대인에게 예수께서 비유로 하신 말씀
 이 마태복음 22장 내용에 대해서는 기독교 교파마다 해석에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내용이 역사 전체를 말하는 것이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에 대한 내용인데 여기에 순서의 차이가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마태복음에 기록된 이 내용은 예수께서 그 당시의 사람들을 교훈하신 내용입니다만,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해당이 됩니다. 하지만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롬 1:16 하신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먼저 정하신 유대인에게 말씀하시는 교훈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누가복음 14장에도 비슷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기는 합니다만, 마태복음의 내용에서 유대인들이 받을 수 있는 교훈이 더 확실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내용은 21장에 나타난 비유의 내용과는 전혀 다른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해 비유로 대답하신 것이겠습니까? 이 대답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유대인들의 역사에 대한 의문에 정확히 답변해 주신 것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의 역사 가운데 큰 의문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들에게는 선지자들이 외치는 소리 등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언제 오실까 하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시고 나사렛에서 자라신 이후에 갈릴리에서 전하시고 가르치실 때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맞는지 상당히 궁금해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나심과 관련된 의문은 예수 탄생 때도 있었고,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도 계속 부딪치는 문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비유로 대답하셨다는 것은, 누군가 앞에서 한 질문에 대한 답을 하신 것이라기보다는 그 민족의 역사에 대해 하나님의 아들로서 답을 하신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며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자부하는 그 민족만이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의문에 대한 대답이며 하나님께서 정하신 나라에 대한 대답입니다. 즉 천국을 향해 소망을 가지고 살고 있는 그 민족에게 천국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 각 나라의 사람들이 자기 민족끼리 만들어 낸 질문에 대한 답과는 전혀 다릅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읽을 때 구약성경 첫 장부터 의문에 사로잡힙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을 보면 ‘정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을까? 하나님은 어디 계실까?’ 하면서 창조론이 맞느냐, 진화론이 맞느냐 하는 문제에 부딪칩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들이 믿든 말든, 이해하든 말든, 따르든 말든 상관없이 창세기 1장 1절부터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서론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의문 속에서 세상에 태어나 많은 의문을 품다가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얻기 전에 죽습니다. 인간에게는 엄청나게 많은 의문이 일어나는데, 그중에 왜 태어났느냐 하는 의문에 대한 답은 인간이 하지 못했고 또 찾지도 못했습니다. 더 나아가 왜 사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도 내놓지 못했습니다. 사람은 죽는데 왜 죽느냐 물어도 답이 없습니다. 죽으면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에 ‘죽으면 그만이지.’ 하는 답이 지배하는 시절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에게 양심이 있다면 죽음 뒤편의 문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은 기독교나 가톨릭이나 종파에 상관없이 그러하고, 전혀 다른 종교인 불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으면 그만이다, 죽음 이후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마음대로 살고 싶은 욕심과 죄악성이 있기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죽음 저편의 것은 책임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종교는 그러한 인류의 의문에 답을 해 주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인간은 본성대로 종교를 만들었습니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은 종교에 있습니다. 동물에게는 종교가 없습니다. 인도나 태국, 일본 등 원숭이가 많은 나라에서 보면 원숭이들이 부처상 위에서 놀기는 해도 절은 하지 않습니다. 원숭이들에게는 절대로 종교가 없습니다. 종교는 인간을 대표하는 성격입니다. 사람은 태곳적부터 종교를 가져 왔고 아마 인류 종말 때까지도 계속 종교를 가질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영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많은 영혼들이 이 세상에 왜 태어나며 왜 죽습니까? 몸은 죽어 사라져도 영은 어디론가 떠납니다. 어릴 때 참 재미있게 읽었던 동화책 내용이 생각납니다. 어떤 어리석은 청년이 콩을 먹었더니 비릿한 냄새가 나고 맛이 없어 뱉어 버렸는데, 볶은 콩을 먹었더니 참 고소하고 맛이 있었습니다. 그 후 이 청년은 밭에 볶은 콩을 심었습니다. 맛있는 콩을 심으면 맛있는 콩이 그대로 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콩은 나지 않았습니다. 모양은 같아도 볶은 콩에는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산 것과 죽은 것에 모양의 차이는 없지만, 죽은 것은 생명을 나게 하지 못합니다.
 인간이 만든 교훈과 학문, 사상 같은 것은 가르치고 훈련하면 다음 세대로 이어지지만, 생명은 생명에 의해서만 전달됩니다. 낳아야 합니다. 또 그렇게 난 인생이라도 영혼이 몸 밖으로 나가면 지위 고하나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몸만 남게 됩니다. 그러면 가족들은 사랑하고 가까웠던 그 사람을 멀리 보내야 합니다. 
옛사람들은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 3년간 무덤을 지키며 오래오래 부모를 기렸습니다. 효를 행하는 사람들은 영혼이 떠난 그 몸을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사회가 바빠져서 가능한 한 자기 일상으로 빨리 돌아가려고 마음을 빨리 돌립니다. 혹은 미련을 두지 않으려고 마음을 빨리 바꿉니다. 
 어느 종교든지 사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는 문제를 이야기합니다. 기독교인들에게 물으면 죽은 후에 하늘나라에 간다고 말할 것입니다. 또 천주교인들에게 물으면 연옥에 갔다가 세상 사람들이 기도를 잘해 주면 하늘로 올라간다고 할 것입니다. 불교인들은 극락에 간다고 합니다. 이렇듯 각 종교마다 어떤 미지의 장소에 대해서 말하고 거기에 대한 여러 가지 답들을 내놓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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