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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복음서를 읽으면서 79회
마태복음 20:17-19
누가복음 18:31-34
마가복음 10:32-34
2002. 10. 5. 강연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니 제삼 일에 살아나리라  (마태복음 20:17-19)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예수께서 하신 이 말씀은 베드로가 예수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16:16) 라고 했을 때에도 하신 적이 있는 말씀입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는데 (마 16:21 참조), 자신의 죽음의 날이 가까이 왔을 때 한 번 더 강조해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짧은 말씀 속에는 우리가 생각해야 될 아주 깊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누구도 절대로 변경시킬 수 없는 절대적인 일을 예정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예정하셨다는 말을 합니다만, 예수께서 하신 이 말씀 속의 예정이 없었다면 그 어떤 예정도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사실들은 성경 전체의 핵심이라 보아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중요한 사실을 예수님의 입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운명에 대해 하신 이 말씀은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해당하지 않고 다른 어떤 사람이 흉내 낼 수도 없습니다. 누구도 이만한 예언을 한 적이 없습니다. 세상을 살다 간 모든 사람들 중에, 또 앞으로 태어날 사람들 중에 이런 일에 직접 놓인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또 없을 것입니다. 미래를 예측한 학자들의 이야기나 역사 소설, 드라마틱한 영화 속에는 예언적인 일들에 대한 내용도 많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에 흔하게 퍼져 있는 그런 것들에 솔깃해 하고, 또 속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때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점쟁이가 점괘를 보는 식의 예언이 아니었습니다. 또 사람들이 마음대로, 생각나는 대로 지어내어 말하는 것과는 판이한 이야기였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동정을 받거나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 이 심각한 이야기를 하신 것도 아닙니다. 역사를 두고 이어 온 한 민족에게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사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 말씀 속에는 그 민족이 시작되기도 전, 인류 역사의 시작 때, 즉 인간의 첫 조상 때에 약속하신 예정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정이 예수에게 이루어진다는 그 내용은 이제껏 인류가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그 사실이 아주 간략하면서도 쉽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내용이지만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마태복음에 기록되지 않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유대인들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던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인 니고데모에게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요 3:10) 고 하셨고, 바울도 자신의 수제자에게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딤후 3:15)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이 말씀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특별하게 뽑은 열두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으레 살다가 죽는다고 생각하고 또 그것이 사실이지만, 이때 예수께서 말씀하신 자신의 죽음은 인간이 생각하고 겪는 죽음과 다른 죽음입니다. 예정된 죽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죽음에 대해서는 어떠한 사람들에 의해서 어떠한 모습으로 죽는다는 것까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자기 죽음을 예견할 때는 죽음이 가까웠다고 한다든지 어려움이 닥칠 것 같다고 생각하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에는 예수님이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죽는다고, ‘이방인’이 죽일 것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직접 죽인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죽이기로 결정한 것은 유대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게 예수를 죽여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물론 판결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을 재판하여 죽이기로 결정하거나 어떻게 죽이라고 다른 사람에게 넘길 수는 있지만, 예수의 죽음은 어떤 사람들에 의해 누구에게 넘겨지고, 그들이 받아서 재판하여 어떻게 죽일 것까지 구약성경에 이미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선지자들의 한 말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예수의 죽음은 보통의 죽음과 전혀 달랐습니다.
이때 예수께서 말씀하신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언은 예수의 마음에서 일어난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 인간의 몸으로 탄생하시기 전에, 그분의 영이 선지자들의 마음을 움직여 그들의 입을 통해 그 말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직접 하셨던 일입니다. 예수께서 탄생하시기 오백 년 전, 칠백 년 전, 천 년 전, 천사백 년 전 옛 시절의 선지자들이 자기 생각대로 말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이 선지자들의 마음속, 머릿속 깊이 그 생각을 일으키셨고, 그들의 입을 쓰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입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전해져 온 내용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이 땅 위에 인간의 몸을 쓰고 오셔서 직접 인간의 입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기록된 것들이 이제 시작된다고, 구약성경의 선지자들에 의해 기록된 모든 말이 이제부터 자기에게 이루어진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때 예수께서는 자신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그”라고 삼인칭을 사용하셨습니다. ‘내가 그렇게 된다. 내가 그렇게 당한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마태복음은 성경을 아는 유대인들, 즉 어려서부터 구약성경을 배워 온 사람들, 구약성경을 통독해 왔거나 구약성경의 율법에 따라 행동해 왔던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7장을 보면, 예수께서 죽으시고 살아나셔서 승천하신 이후 스데반이 예루살렘에 모인 많은 유대인들에게 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 스데반은 선지자들이 조상들에게 했던 저주의 말이 이루어질 것을 염려하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사도행전 7:51-52)
스데반은 유대인들이 그 조상들과 같이 한다고 말했습니다.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살아온 것이 이스라엘의 역사였습니다. 의인이 오시리라고 예고한 선지자들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죽였듯이, 이때 유대인들도 예수를 잡아 이방인에게 넘겨주며 죽여 달라고 했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요 1:11) 라고 한 대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의 설교 속에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하나님의 성령을 정식으로 거부한 내용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때 이 사람들은 스데반이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라고 했던 대로 하고 말았습니다. 그 일이 그들에게 이루어지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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