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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복음서를 읽으면서 72회
마태복음 18:15-20
2002. 7. 27. 강연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태복음 18:15-20)
마태복음을 기록한 세리 마태
이 말씀은 읽기에는 쉽지만 실천하기는 굉장히 어려운 말씀입니다. 신약성경이 인류에게 주어진 지 벌써 2천여 년이나 되었고, 세상에는 성경에 대해 논하는 책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위대한 책이라도 성경보다 나은 책은 없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내용을 얼마만큼 터득하고 알아 가느냐가 중요한데 무조건 성경대로 행해야 한다든지 성경대로 살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이 믿는 사람들의 일반 상식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대로 행하고 있는지를 물으면 답하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이 내용은 쉽고 간단하지만, 이를 통해 실제로 이렇게 하고 있는 교회의 수는 얼마나 되며, 또 이렇게 이행하고 있는 교인들은 얼마나 되는지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전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지상 명령이라고 보아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먼저 우리는 당시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 가운데 나타난 명령이 과연 실천 가능한 문제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내용은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이 말을 듣고 있는 유대인들은, 누군가 그들에게 ‘당신들은 누구냐?’는 질문을 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믿는, 그 열조의 후손들이다.’ 하고 자랑했을 사람들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신앙심도 상당히 두터웠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과연 이 말씀을 받아들여 생활에 적용하고 실천할 수 있는 힘이 있었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현재를 사는 우리가 과거를 돌아볼 때, 또 기독교 역사를 살펴볼 때 이것이 가능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은 온통 인간이 저지른 문제들로 가득합니다. 교회 자체에서도 여러 교파나 교단이 파생되었습니다. 어떤 문제가 있을 때 이 말씀대로 하기는 해야겠는데 조건이 맞지 않다, 실행하기 힘들다 하는 문제에 놓이는 것입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마태복음 18:15-17)
우리는 성경 말씀을 자기 위주로 듣고 자기 위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먼저 “네 형제”의 “네”가 누구이며, 왜 “형제”라는 표현을 하셨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또 “교회”라고 하셨는데,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당시에는 지구상에 어떤 교파도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는 아직 이 지상에 없던 시절이었는데 왜 “교회”라는 말씀을 하셨을까요? 우리에게는 이러한 의문을 해결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인 순수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다른 어느 나라 사람도 이 가운데 개입될 수 없습니다. 이때 예수께서 하신 “네 형제”라는 말은 지금 지구상에 있는 어느 교파, 어느 교단, 예수 믿는 어떤 단체에서 믿은 사람들끼리 부르는 ‘형제자매’ 같은 말이 절대 아닙니다. 이것은 율법을 알고 준행하려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속한 문제입니다. 당시 로마나 헬라 등 다른 어떤 나라의 사람도 “네 형제”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이 말은 순수한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는 직업이 세리였습니다. 요즘으로 하면 국세청이나 세무서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만 당시 세리들은 유대인들에게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세리들은 똑똑하고 계산도 빨랐지만 자기 민족에게는 반역자가 되어 업신여김과 괄시를 받았습니다. 심지어 “세리와 창기”라고, 창기와 같이 취급받을 정도였습니다.
율법과 십계명을 좇아 사는 유대인들은 그렇지 못하고 난한 죄를 범한 사람에게 ‘창기’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또 당시 세리들은 자기 동족에게서 세금만 징수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덧붙여 받아서 일부는 자기가 취하고 일부는 로마 사람들에게 바치면서 로마 제국의 앞잡이 노릇을 했습니다. 육체적으로 문란한 사람이 창기라면, 세리는 정신적으로 동족을 팔아먹는 배신자였습니다. 그래서 창기와 같이 취급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신약성경에는 세리에 대한 이런 기록도 있습니다. 어떤 바리새인과 세리가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을 때, 바리새인은 따로 서서 기도하며 “하나님, 저는 간음을 하는 자들이나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하고 자신을 하나님 앞에 높여 놓았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고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이 세리를 더 낫게 보셨습니다. (눅 18:10-14 참조)
그런데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가 바로 세리였습니다. 셈이 빠른 사람답게 마태는 처음부터 아주 정확하고 세밀하게 마태복음을 기록했습니다. 민족의 모두가, 특히 민족의 대표 되는 종교 지도자들이 민족의 반역자로 몰아 버리는 위치에 있는 마태가 죄에 대해 설명한 것은 참 모순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태를 인간적으로 보면, 그는 동족들로부터 인간 이하의 취급을 당하며 손가락질과 조소를 받는 짓밟힘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기록한 글의 내용은 자신의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것을 명령하는 절대적인 분의 심부름꾼으로서 받은 그대로 대필하는 자세를 취했기에 이 글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좌절감 때문에라도 이런 글을 쓸 수 없을 것입니다. 마태는 ‘저 사람은 죄인이고 민족의 반역자이며 민족의 세금을 거두어서 적국에게 넘기는 자인데 어떻게 감히 이런 글을 쓸 수 있지?’ 하는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짓눌려서 꼼짝 못 하는, 정신적으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입장에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도 전 민족이 괄시하는 세리 마태와 색깔만 다를 뿐 인간으로서 바닥까지 처박히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전에 “다른 사람은 다 예수를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습니다.” (마 26:33 참조) 라고 말할 정도로 절대적인 각오와 자부심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에게 “사탄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눅 22:31-32 참조) 예수님이 잡혀가신 후 베드로는 모닥불 앞에서, 대단한 장군이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도 아니고 하잘 것 없는 여인이 ‘당신은 예수를 따라다니던 사람이 아니냐?’고 하자, 자기가 3년이나 모셨던 선생님을 저주하고 부인하며 “내가 그 사람을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고 맹세까지 했습니다. 
베드로가 자기 살 길을 찾기 위해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하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예수께서 미리 말씀하신 대로 닭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쪽에 계신 예수와 시선이 마주쳤습니다. 그 미묘한 순간에 베드로는 심히 통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 26:69-75, 막 14:66-72, 눅 22:54-62 참조) 그의 감정이 얼마나 뒤흔들렸겠습니까? 사람들 앞에서 ‘자기는 죽어도 예수를 버리지 않겠다.’고 했던 사람이 거기서 거꾸러질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런 자신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자부심이 있었고 확실한 주장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인간으로서 완전히 바닥에 처박힌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심히 통곡했던 그날, 베드로는 자기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힘은 나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렇게 배신한 자신 앞에 나타나셔서 40일 동안 보이시고 떠나신 열흘 후에 성령이 이 땅 위에 오셔서 교회가 시작되었을 때, 비로소 베드로는 과거의 것을 다 잊고 일어났습니다. 50여 일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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