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동산의 중앙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같이 있었습니다. 빛과 어두움이 이 세상에 함께 존재하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그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왜 만들었느냐고 따질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던 과정을 제대로 이해하면 그런 오해는 분명히 사라집니다.
그런데 그 나무를 통해서, 그 나무의 열매를 통해서 인간이 속아 넘어가 인류가 죄에 빠졌습니다. 죄에 빠지자마자 아담이 취한 행동은 나무 잎사귀로 옷을 만들어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을 때, 아담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우리 인생이 세상에 태어나 살면서 죄인인 것을 알지도 못한 채 죄 중에 헤매고 자신의 죄를 스스로 가려 보려고 노력할수록 점점 더 깊이 죄의 늪으로 빠져들어 가는 모습을 이런 아담의 모습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자신을 찾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한 아담의 부르짖음은, 하나님 앞에 절규하는 인생의 괴로운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입니다.
나무를 통해 죄에 빠져 버린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창 3:17-18 는 것이었습니다. 가시덤불과 엉겅퀴도 나무의 일종입니다. 그것들 사이에서 먹을 것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아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후에 태어난 아담의 아들 가인은 농사를 지어서 얻은 것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가인과 제물을 함께 열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전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위해 직접 짐승을 잡아 가죽옷을 지어 입혀 주신 일이 있었습니다. 가인의 아우 아벨은 그 모습과 마찬가지로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하나님께 드렸고,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제물을 함께 열납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화목제를 드릴 때, 짐승 밑에서는 나무가 함께 타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말끔하게 정리되는 모습을 이스라엘 민족의 제단에서 다시 한번 목격할 수 있도록 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내용들을 율법서의 기록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나무를 통해서 비추어지고 있는 우리의 운명과,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짐승을 잡아서 드리는 제사, 그 두 가지의 모습을 계속해서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 날, 세상에 태어나 목수로 지내시던 예수께서 한 소경을 만나셨습니다.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대시기를 구하거늘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우러러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
마가복음 8:22-25
예수께서는 이 소경의 눈에 침을 뱉으셨습니다. 현대의학의 관점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사람의 얼굴에, 그것도 눈에 침을 뱉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상당히 모욕적인 행동입니다.
이것은 내가 성경이라는 거울을 통해서, 겉으로는 말끔하게 씻고 깨끗한 옷을 차려입은 나라는 인간 속에 들어 있는 내 속 사람을 발견했을 때 느낄 수 있는 감정입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렘 17:9-10 라는 말씀처럼, 성경을 통해 내 마음을 들여다보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만물보다 심히 거짓되고 부패한 내 마음 상태에 대해 마치 내 얼굴에 침을 뱉듯이 지적해 주신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59장에는 우리가 소경같이 담을 더듬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10절 참조 육체의 눈은 뜨고 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영혼의 눈은 감겨 있는 상태를 소경에 비유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소경의 눈에 침을 뱉으신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말씀하시는 모습입니다. 예레미야서에는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기에게 욕으로 여기고” 6:10 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내 상태를 지적해 주시는 말씀을 듣고 불쾌하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이 소경이 무어라고 말했습니까? 예수께서 무엇이 보이냐고 물으시자 소경은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죄가 살아서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모습을 발견하는 우리 모두의 모습입니다. 예수께서는 소경의 눈을 어루만져 주셨고, 소경은 만물을 밝히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성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짖고 ‘제가 이러한 사람입니다.’ 하고 인정하고 하나님의 어루만져 주심을 기다렸을 때 내게 일어날 일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평생 나무에 못을 박고 나무를 다듬던 요셉의 집안에 태어나 목수로 자라신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이스라엘 민족에게 보여 주시는 이러한 일들은 언젠가 그 나무에 예수님의 육체가 달리게 될 것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내 죄가 예수라는 분에게 합쳐져 심판을 받아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 죄는 하나님 앞에서 허물어졌습니다.
그 제사의 역사는 성경 속에 끊이지 않고 나타납니다. 노아도 대홍수 후에 방주에서 나와 짐승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브라함도 아들 이삭의 어깨에 번제에 쓸 나무를 지우고 함께 모리아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이삭의 아들 야곱은 죽은 짐승의 가죽을 목과 팔에 감고 아버지 앞에 나아가서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제사의 역사가 창세기 속에 계속해서 흘러가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언가 말씀하고자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으로 내려가 430년이 흐른 후에 유월절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짐승을 잡아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바르라고 하셨습니다. 이 문은 바로 내 마음속에 있는 죄의 문을 보여 줍니다. 내가 끊임없이 드나들며 죄를 짓고 있는 그 죄의 문에 짐승의 피를 바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애굽 땅을 치러 두루 다니실 때 문에 발라져 있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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