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2천 년 전 바리새인의 관습에 동조합니다. 누가 실컷 돌아다니다가 음식 먹는데 손도 씻지 않고 그냥 수저를 든다든지, 빵을 그냥 집어 든다든지 하면 아마 이 바리새인보다 훨씬 신경이 쓰였을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제게 ‘당신은 예수에게 도전합니까?’ 라고 하실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만, 제 위생 관념의 기준으로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이 만약 예수의 행동을 보고 위생적인 관점에서 이상하게 생각했다면 저와 같은 입장인 것입니다. 물론 이때는 온 세상에 그다지 공해가 없었던 시절이고, 세균에 대한 걱정도 별로 하지 않았을 때입니다. 다만, 이 바리새인이 예수의 행동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졌던 것은 의학적이거나 청결 문제와는 전혀 관계없이 종교적인 관점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왜 종교적인 습관을 이행하지 않느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옛날 어떤 글에서 이런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미국 시카고에서 부흥의 불길을 일으킨 디 엘 무디라는 사람이 배를 타고 가는 중에 불이 났습니다. 그런데 그 배에 타고 있던 종교인들은 이 유명한 설교자 옆에서 ‘우리 기도합시다’ 라고 했답니다. 그때 이 유명한 설교자는 ‘불 끄면서 기도하자’고 주장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배에 불이 난 위급한 상황인데, 기도하고 있다가 배가 다 타버리면 모두 물에 빠져 죽거나 불에 타 죽잖아요?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사람을 곱게 보시고 그냥 가만히 있는 사람들을 위해 비를 쫙 내려서 금방 불을 다 꺼주시겠습니까?
저는 무디의 말이 전적으로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종교에 심취해 있는 사람들 중에는 불을 끄면서 기도하자고 한 이 설교자에 대해 그가 믿음이 없다고 판단하거나, 하나님을 도외시한 사람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제가 주일 학교에 다닐 때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아이가 소풍을 가서 도시락을 꺼내 펼쳐놓고 기도를 했는데, 다른 아이들이 그 모습을 보고 그 아이를 빈정대고 흉을 보다가 나중에 큰 사고를 당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했던 그 아이만 괜찮았다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에 기도하는 것도 종교에 따라 다릅니다. 이 세상에 9억 6천만명이 넘는다는 그 많은 천주교인들은 밥 먹을 때 십자가를 긋습니다. 얼마나 빨리 긋는지 쓱 긋고 바로 입안으로 숟가락이 들어갑니다. 또 신교인들에게 식사 기도를 하라 하면 너무 길게 기도를 해서 음식이 다 식어버릴 때도 있습니다. 언어 구사력이 좋아서 여러 사람 앞에서 한참 지껄이다 보면 침이 튀어서 밥뚜껑에 침이 하얗게 말라있기도 합니다.
본래 바리새인이었던 사도 바울은 자기는 유대인에게는 유대인 행세를 하고,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의 행세를 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고전 9:20 참조) 그런데 예수님은 바리새인에게 초대를 받으셨을 때 손을 씻지 않으셨습니다. 유대인들을 가르치는 지도자인 바리새인들은 종교적인 행동으로 손을 씻고 음식을 먹었는데, 바리새인의 집에 초대받으신 예수님이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지 않으신 것은 요즘 말로 하자면, 어떤 종교인의 집에 초대받은 사람이 기도하지 않고 음식을 먹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지금 시대는 밥상 앞에 앉았을 때 기도를 하면 예수를 믿는 것이고, 기도를 하지 않으면 믿지 않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밥상 앞에서 죽을 때까지 기도해도 하늘나라에 가지 못할 수 있습니다.
제가 기도라는 형식을 없애려고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속에는 어떤 사람들의 기도에 대해서 예수님이 아주 신랄하게 말씀하신 내용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기도를 유창하게 하고 열심히 잘 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예수께서는 그것까지도 경멸하셨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이 바리새인 앞에서, 예수께서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드셨다는 것은 위생 문제와 상관없이 종교적인 행동에 있어서 낙제점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과 비슷한 내용을 읽어보겠습니다.
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20:45-47)
기도를 길고 유창하게 하면 하나님도 더 잘 들어 주실 듯한데, 예수님은 왜 기도를 길게 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서기관들이 어느 과부 집에 가서 기도를 길게 한 후 그 집에서 연보를 많이 내도록 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는 아주 정확하고 신랄하게 그것을 지적하셨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이 하고 있는 종교적인 행위는 그들의 위생관념과 전혀 상관없이 겉으로 잘 훈련된 종교적 습관으로 굳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와 같이 겉모습이 거룩해 보이는 바리새인들에 비해 예수님의 겉모습은 볼품이 없었습니다. 구약 성경을 읽다 보면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 53:2) 하는, 예수님에 대해서 기록해 놓은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탄생 750년 전에 기록된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는 아름답지도 않았고, 종교적으로도 이렇다 할 좋은 점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제자들에게 기도도 가르치지 않으시고 또 금식도 가르치지 않으시니까 오히려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눅 11:1) 라고 부탁을 할 정도였습니다.
대접의 겉은 깨끗이 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은 상당히 자유분방한 것같이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내용을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면 이들의 종교적인 행동은 사람들 보기에 괜찮고 또 정돈도 잘 되어 있고 질서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에는 무엇인가 빠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의 행동은 잘못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왜 그렇게 지적하셨을까요? 이 바리새인이 예수를 보고 ‘당신, 왜 손을 안 씻었습니까?’ 라고 하면서 손을 씻지 않으신 것에 대해서 직접 지적했다면 예수께서는 다른 이야기를 하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께서는 이 사람이 예수의 행동을 보고 이상히 여기는 그 마음 상태를 들여다보고 계셨습니다. 자식을 여럿 키워 본 어머니는 아이가 엄마 모르게 어떤 것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아이의 눈빛만 보고도 알 수 있습니다. ‘이 아이가 지금 딴 소리를 하는구나. 네 마음에 무언가 있다는 것을 내가 안다. 네 속을 다 들여다보고 있다.’ 하고 지적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때서야 아이는 깜짝 놀랍니다. ‘어떻게 알까?’
우리 어릴 때 일인데, 한 아이가 교실에서 무엇을 잃어버렸습니다. 누가 가져갔느냐고 물어도 대답이 없고, 다시 가져다 놓으면 벌을 주지 않겠다고 아무리 말을 해도 잃어버린 물건을 갖다 놓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조그만 항아리를 하나 가져다 놓고 아이들을 한 줄로 세웠습니다.
“자, 다 한 줄로 서서 지나가면서 이 항아리 속에 손을 넣어라. 이 항아리 속에는 자라가 한 마리 들어 있는데 이놈은 무엇을 훔쳐간 사람이 손을 넣으면 손가락을 깨물어 먹어버린다. 훔치지 않았으면 절대로 물지 않으니 모두 다 손을 넣어라.”
이제 선생님부터 손을 넣었고, 다른 아이들도 다 항아리에 손을 넣었는데 오직 한 아이만 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물건을 가져 간 사람을 찾았습니다. 선생님이 지혜롭게 한 것입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어른들은 사람이 가진 생각이 어떻다는 것을 조금 꿰뚫어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 예수께서 이 바리새인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하신 이야기는 그런 것과는 다릅니다. 예수께서 손을 씻지 않으시고 자리에 앉으셨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것은 그 사람만 가지고 있던 생각이 아닙니다. 당시 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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