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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제36회 성경탐구모임 2004년 7월 31일 오후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     창세기는 성경 전체에서 창세기를 제외한 나머지 65권을 아주 간략하게 축소시켜 놓은, 어떤 씨와 같은 역할을 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너보다 높음이 보좌뿐이니라” (창 41:40) 고 말한 바로 왕을 모시고 있는 요셉의 모습은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권세를 물려받은 예수님의 모습과도 꼭 같습니다. 또 창세기 마지막 부분에 있는 요셉과 형제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7년 환난 중에 이스라엘 민족의 회개 운동이 일어나고, 예수님이 지상에 재림하셨을 때 그들이 만왕의 왕으로 군림하신 예수님 앞에 그대로 엎드러지는 모습을 연관시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하늘과 둘째 하늘, 셋째 하늘이 합쳐지기 전의 천년 왕국, 즉 유대인을 중심으로 하는 왕국이 이루어지고, 거기에 현재의 우리가 입고 있는 이 육체와는 다른 변화된 육체를 가지고 계시는 예수님의 그림자적인 표현이 창세기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성경 마지막 부분인 요한계시록 21장,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1절) 하는 내용은 천년이 지난 후에 첫째, 둘째, 셋째 하늘이 하나로 합쳐지는 어느 순간에 이루어질 영원한 나라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고전 15:24) 하는 그 때입니다. 창세기 끝에서도 이와 닮은 내용들이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출애굽기로 넘어가는 과정을 보면, 둘 사이에는 4대, 약 430년의 기간이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시기까지의 사이에도 약 400년의 기간이 있었습니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베드로전서 1:10-11)     그 400년의 기간 중에는 위 말씀에서 언급된 선지자들이 없었습니다. 구약 성경 속에 나타난 마지막 선지자는 ‘말라기’입니다. 학개, 스가랴, 말라기 이 세 사람이 구약 시대의 마지막 선지자들인데, 기원전 6세기 경에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기록하고 떠나간 사람들입니다. 이 마지막 선지자들로부터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한 여인의 몸속에 잉태되기까지는 약 40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습니다.     어린 시절 학교 다닐 때 저는 서론, 본론, 결론의 순서대로 원고지에 몇 페이지 글을 쓰는 숙제를 하곤 했었습니다. 그렇게 써 온 것을 선생님들이 읽어보고 점수를 매기는 교육 과정을 거쳤는데, 창세기라고 하는 책은 성경 전체에서 서론에 가까운 책입니다. 앞으로 어떠한 일들이 전개될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들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의 다음에 있는 출애굽기의 시작은 창세기의 시작과 닮았고, 또 마태복음의 시작과도 닮았습니다. 마태복음 서두를 살펴보면, 헤롯이 유대 땅에 분봉왕으로 있을 때, 즉 로마라는 이방 제국이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을 당시, 선지자들도 끊어지고 마냥 세월만 흘러가는 것처럼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게 짓밟혀 있을 그 시기에, 한 여인의 몸속에서 한 생명이 자라나기 시작한 내용이 나옵니다. 이것은 마치 창세기 1장,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던 땅에 “빛이 있으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빛이 비취기 시작한 것과 같습니다.     또 출애굽기의 서두를 살펴보면, 요셉이라는 사람을 통해 이집트에 옮겨지게 된 이스라엘 백성이 430년이라는 시간을 지나는 동안 상당히 어려운 지경에 처하게 된 내용이 나옵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일어나서 이집트를 다스리더니 그 왕이 이스라엘 백성을 핍박하고 또 노예를 삼아서 ‘라암셋’이라는 도시를 건설하게 합니다. 출애굽기는 하나님께서 선택한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라는 세상에서 아주 혹독한 노예 생활을 하는 모습으로 시작됩니다. 이 내용 또한 창세기 1장 서두와 꼭 닮았습니다.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던 땅에 빛이 있었던 것처럼, 모세라고 하는 한 선지자가 일어나 고통 가운데 처해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합니다. 이 모세는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시대는 다르지만, 동일한 하나님의 일이 되풀이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살펴볼 때, 솔로몬 왕이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전 1:5-7) 하는 설명을 하면서,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전 1:9) 고 말했던 내용들을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잠언도 마찬가지입니다. 잠언의 내용 속에는 ‘악인은 이러하며 의인은 이러하다, 미련한 자는 이러하고 슬기로운 자는 이러하다’ 고 흑백이 대비되는 내용이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흐릅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의 내용과 꼭 닮았습니다. 잠언의 마지막 31장에는 현숙한 여인이 나타나는데, 이 여인은 언젠가 실제 역사 속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한 몸으로 합쳐지게 될 교회의 모습입니다. 잠언이나 전도서는 철학서에 가까운 사상적인 책이 아니라 실제 이스라엘 역사를 조명해 주는 책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이집트 왕은 정책적으로 이스라엘 여인이 남자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스라엘 민족 중 남자 아이의 수가 많아지면 나중에 그 아이들이 자라서 군대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미리 제거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레위 자손의 집안에 한 남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 부모는 아이를 죽이는 것이 안타까워서 아이를 광주리에 넣고 하수에 떠내려 보냈습니다. 이집트의 공주인 바로의 딸이 아이를 발견하고 유모를 구해 키우게 했는데, 그 아이의 친 어머니가 유모가 되었습니다. 그 아이가 바로 모세입니다.     이 모세가 등장하는 모습을 살펴보면, 모세는 어느 엉뚱한 곳에서 자라다가 갑자기 이집트에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는 유월절이라는 재앙으로 완전히 뒤집어엎어질 이집트의 한복판, 왕궁에서 자라났습니다. 먼 곳에서 자란 아이가 어른이 되어 선지자로 변모해서 쳐들어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후에는 모세가 미디안 땅에 갔다 오기는 했지만, 그 아이의 시초가 어디였느냐 하는 문제는 아주 중요합니다. 그는 이스라엘 민족과 대적하게 되는 이집트 왕궁의 정 중앙에서 왕자로 자라났습니다.이런 사실들을 보면, 하나님은 대단한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 (슥 14:4) 라는 말씀에서처럼 첫 번째 왕으로 군림하실 그리스도를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리스도가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에는 순서가 정해져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이 땅에 태어나 먼저 고난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이 땅에 나타나는 모습을 보면, 갑자기 하늘에서 내려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사 7:14) 하신 말씀대로 어느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는 않지만,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그 중에서도 갈릴리 땅에서 유다 지파 중 요셉이라는 사람과 마리아라는 여인이 약혼을 했는데, 두 사람의 육체적 결합이 없는 상태에서 그 여인의 몸속에 아이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다윗이 살던 베들레헴이라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일들을 이집트 왕궁 한복판에서 자라난 모세의 생애를 통해서도 볼 수 있습니다. 또 모세가 태어나기 약 550년 전에 갈대아 우르 땅에 살던 선지자 아브라함을 가나안 땅으로 불러들이는 모습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례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집트에 내려갔다가 다시 가나안 땅으로 올라올 때 많은 육축과 은금을 가져왔듯이, 훗날 이스라엘 민족도 출애굽 할 때 많은 재물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또 아기 예수님이 죽음을 피해 마리아의 품에 안겨서 이집트 땅에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이런 내용들을 보면,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 (사 34:16) 하신 말씀대로,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그대로 맞아떨어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한편 왕궁에서 자라난 모세는 유모인 자신의 친어머니에게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의 자손’임을 배웠고, 40세가 되었을 때 노예 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둘러보다가 어떤 이집트 사람이 이스라엘 백성을 때리는 것을 보고 격분하여 그 이집트 사람을 때려 죽였습니다. 다음 날 모세가 또 밖에 나갔더니 이번에는 이스라엘 사람들끼리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말리려고 하니까 그중 한 사람이 말하기를 “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와 법관을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임같이 나도 죽이려느냐” 하니까 모세는 겁이 덜컥 나서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가게 됩니다. 거기에서 미디안의 제사장인 이드로라는 사람의 사위가 되어서 40년을 지냅니다.     그리고 그 후 나이 80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이 모세 앞에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출애굽기 3:10)     모세가 듣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하나님의 이름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출애굽기 3:13)     이때 하나님께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며,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답을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우리가 섬기는 이 많은 신들이 결국은 하나다’ 라고 생각하는 그런 신 말고, 아주 구체적으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발표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출애굽기 3:14-15)     여기에서 14절,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라는 말은 영어로는 “I am who I am” 또 스페인 말로는 “yo soy el que soy”입니다. 이 말을 직역하면 ‘나는 나다’ 입니다. 그것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선교사들과 우리 한국 성경학자들이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라고 표현한 것 같습니다. 이 말은 독일어도 그렇고 영어도 그렇고 현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참 특이한 내용입니다.     현재라는 시간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정의를 내리기는 참 어렵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여러분께 말해온 이 말들도 과거에 속하는 것입니다. 제가 앞으로 5분 후에, 10분 후에 이야기할 말들은 미래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현재란 무엇일까요? 현재라고 하는 시간이 무엇이냐고 물리학도들에게 물어 봐도 대답을 잘 못합니다. 그런데 이 성경에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하는 현재형을 하나님의 이름에 그대로 붙여놓았습니다.     훗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인들 앞에 섰을 때 유대인들이 물었습니다.     “네가 아직 오십도 못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예수님은 대답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요 8장 참조)     이 대답을 주목해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었느니라’가 아니라,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Before Abraham was I am) 하는 현재형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구약과 신약에 나타나는 그 하나님으로서 항상 현재라는 시간을 잡고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런 대답을 할 수 있었습니다.     혹자는 현재라는 시간이 과거의 시간과 미래의 시간을 합해서 계산했을 때 나타나는 시간이라고 어렴풋이 설명을 하지만, ‘이것이 현재다, 지금이다’ 하는 시간을 확실하게 설명하라고 하면 못합니다. 딱 꼬집어서, ‘이것이 현재다’ 하는 시간은 사람이 이 세상에 살 동안 단 한번 경험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이 거듭나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의 시간과 사람의 시간이 일직선상에 서는 시간입니다. “믿음이 온 후로는” 갈 3:25 하는 말씀처럼, 믿음이 내 마음 속을 파고 들 때 나 자신의 변화된 모습을 돌아보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 사람이 ‘내 생활이 변해간다, 내게 전에 없었던 어떤 마음이 생겼다’ 라고 느낍니다.     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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