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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 초기 전도 시절을 회상하며

2005년 8월 7일, 37회 국내외 성경탐구모임을 마무리하는 자리에서 유병언 회장은 자연스레 초기 전도 시절을 회상하는 것으로 작별 인사를 대신했다. 달려온 길을 돌이켜 보고 우리 앞에 놓인 사명을 언급한 설교자의 이야기는 많은 감동을 남겼다. 50번째 성경탐구모임을 앞두고, <글소리>에서는 그날의 이야기를 지면에 담았다.
유병언
37회 수양회를 마치며
이 자리에는 전도하는 분들도 여럿 와 계시고, 또 찬송 부르는 분들도 계십니다. 뒤에서 큰 수고를 한 분들도 많을 줄 압니다.
헤어지기 아쉬운 여운 뒤에는, 생각의 여운이 일어납니다. ‘지금 얼굴을 마주 대하고 있는 사람들을 내년에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훗날에 또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는 기약 없는 날들을 내다보고 살기 때문입니다.
올해 수양회가 37회인데, 1969년에 있었던 첫 회 수양회 때에는 150명이 모였습니다. 어느 조그마한 농장에서 한 수양회였습니다. 강당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버드나무 밑에 작은 책상을 단상으로 놓았습니다. 찬양대는 없었습니다만 매미들이 하도 쉴새없이 노래를 불러대서 설교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애를 먹었습니다. 제 기억에는 그때 에베소서 2장에 대해 설교를 했습니다. 교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해에는 300명이 되었습니다. 300명이나 되니 할 수 없이 서울 쪽으로 수양회 장소를 옮겼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에 750명, 그다음 해에 1,400명으로 자꾸 숫자가 늘어 갔습니다.
그런데 사실 150명이 모인 첫 수양회가 있기 한 해 전의 일입니다. 아주 조그마한 오두막집 온돌방에서 일곱 명이 일주일 동안 모였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우리 삶의 모습을 재정립하자. 일주일을 함께 지내며 앞으로 어떻게 함께 살아갈지, 어떻게 복음을 전할지 생각하자.’ 하고 성경 공부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제 기억 속에는 첫 번째 수양회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다음 수양회 때는 방송국에 있던 이용화 형제도 참석해서 함께 거들었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그때 처음 일곱 명이 모인 것은 수양회라고 하기에 사람이 너무 적었으니 정식 수양회가 아니라 하고는 두 번째를 첫 수양회로 하자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올해가 37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첫 번째 수양회는 일곱 명이 모인 그때입니다.
그때 우리는 아주 무서운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치스당 일곱 명이 독일 정권을 장악할 것을 계획했고, 다 장악한 후에는 유럽을 통째로 삼키고, 더 나아가서는 온 지구를 장악하려 했습니다. 히틀러 이야기입니다. 그는 ‘영국은 대영 제국이라 하면서 지구상에 많은 식민지를 가지고 있는데, 영국보다 몇 배나 큰 우리 독일은 그들보다 많은 땅을 가져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소리를 했습니다. 그것이 히틀러의 중심 사상이었습니다. 그는 지구를 삼킬 꿈을 꾸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이탈리아를 굴복시켜 같은 편으로 만들고, 동아시아에서 최고의 힘을 발휘하던 일본과 손을 잡았습니다. 일본은 아메리카 대륙까지 삼킬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렇게 2차 대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온 지구를 놀라게 했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그들의 패배로 끝났고, 그들의 꿈과 야망은 다 깨졌습니다. 지긋지긋한 전쟁의 괴로움을 겪은 세상은 그런 전쟁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국제연합기구 유엔(UN)을 창설했습니다. 유엔 본부 앞에 있는 공원의 한 벽에는 이사야 2장 4절의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하리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것이 유엔이 추구하는 세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유엔은 그런 세상을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오두막집의 작은 방에서 모인 우리 일곱 명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주께서 평화의 왕국을 다스리실 그때까지, 우리의 숫자는 적지만 세계만방의 누구에게든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한몫을 하자, 조그마한 일이라도 하자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다음 해에 수양회를 계획했습니다. 장소를 어디로 할까 하다가 대구 인근 경산의 하양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하기로 했습니다. 그곳에 농장이 있어서 거기서 모였고, 권 목사님과 제가 강사가 되었습니다. 오후에는 이용화 형제와 둘이 장을 보러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때 이용화 형제에게 작은 대패를 하나 선물한 기억도 납니다. 그 형제는 저보다 다섯 살 위인데, 우리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둘 사이에 의견 대립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곁가지로 다른 이야기를 하나 하자면, 어느 해엔가는 우리 둘 사이가 틀어져 버렸습니다. 1976년경이었습니다. 제가 사업 길로 나서겠다고 했을 때 오고 간 말에 오해가 있었는지, 마음에 잘못된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는지 한동안 못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책상이 겨우 여섯 개 정도 놓인 작은 회사의 사장으로 일하고 있을 때, 어느 날 이용화 형제가 둘째 딸을 데리고 난데없이 회사에 나타났습니다. 반가웠지만 그 아버지는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도록 하고, 먼저 딸아이에게 물었습니다.
“너 이번에 중학교 들어갔지? 교복은 어떻게 했어?”
“언니가 입던 것을 손봐서 입기로 했어요.”
그런 대화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빠에게 보이지 말고 엄마 갖다 드리라고 돈 얼마를 쥐어 주었습니다. 그러고는 아빠는 무슨 일을 하시느냐 물었더니 집에서 마루청을 고치고 대패질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대패 생각이 나서 한 이야기입니다.
우리 교제의 성격은 설교나 전도만 하고 매미같이 찬송만 부르다 마치고 헤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일과 모든 것이 함께 있어 왔습니다. 그것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강당도, 모임 장소도 없을 것입니다. 지금도 어린 학생들이 빗자루를 들고 일을 하거나 다른 활동을 하는 것을 보면 ‘야, 우리 모임 초기에는 너희 같은 아이들이 별로 없었어.’ 하는 말이 입가에 맴돕니다. 청년들, 휴가 나온 군인들이 일을 거드는 것을 보면, ‘야, 우리가 너희 나이 때에 모임에는 성경책과 찬송가밖에 없었어. 자동차도 한 대 없었고.’ 하면서 이야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우리들은 전도하기에 아주 좋은 기회들을 맞고 있습니다. 전도할 사람들도 많아졌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집에서나 어디서나 친구를 만나면, 또 부모님이나 친척들을 만나면 잔뜩 올라온 마음의 생각을 표현하고 싶지만 예의 때문에 차마 하지 못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아는 성경, 내가 믿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고 싶은 심정이 항상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 한마디 충고가 있다면 “성령을 소멸치 말며” (살전 5:19),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엡 4:30) 하는 구절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사정과 하나님의 사정은 다릅니다.
전국의 구원받은 사람을 다 합쳐도 300명이 겨우 되던 당시, 함께 전도하던 권 목사님은 방송국에 취직이 되었다며 대구를 떠나 멀리 인천으로 가셨습니다. 같이 전도하던 사람이 가고 난 자리에 저 혼자 남았습니다. 쓸쓸하거나 외롭다고 느낄 만도 했는데, 그때는 그럴 새가 없었습니다. 매일 몸이 곤죽이 될 정도로 힘들었습니다. 날마다 말씀을 들으러 찾아오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거의 쓰러질 지경이었습니다. 집사람은 오는 사람을 다 맞이하고 음식을 해 대느라 바빴습니다. 
그 당시에는 ‘권 목사님은 인천으로 떠나셨지만, 그래도 믿는 형제들의 생각이 하나라면 거리가 먼들 무슨 관계가 있겠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직장을 얻어서 떠났다 하지만, 먹고살기 위해서 가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러 가신 것이었습니다. 설교 방송을 하러 가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무렵 저는 일기장에 점 하나를 찍어 놓고, ‘이것이 나라면, 옆에 한 사람이 있으면 둘이 교제를 가지게 될 것이고, 복음을 깨달은 두 사람의 공통된 이야기는 옆의 또 다른 사람에게 생소한 이야기가 될 것이고, 그 사람에게 의문이 일어나 관심을 갖도록 하다 보면 어느 날 그 사람도 해결되어 세 사람이 될 것이다. 그 세 사람 중에 누군가가 아는 사람을 데려오고 그렇게 또 한 사람이 끼어들어 이야기를 하다 보면 네 사람이 된다. 때로는 몇 사람씩 끼어들 것이다. 그러다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는 작정을 하기도 전에 주님은 이미 우리를 쓰고 계실 것이다.’ 하는 생각을 기호로 적어 놓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 모임이 이렇게 커 갈 것이라는 것을 암호처럼 적어 놓은 것입니다.
그 당시만 해도 대부분 사람들의 생각이 보수적이었습니다. 기득권을 가진 힘들이 있었습니다. 과거에 다니던 교회에서 직분을 가졌던 사람이나 종교를 가진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앞서려는 힘이 있었고, 또 설교하는 사람을 자기 손아귀에 쥐기 위해 금전적인 압력을 행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그것을 거부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그와 상관없이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낱 사람이 나를 어떻게 하랴.’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복음을 알지 못하던 죄인 시절,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죄를 용서해 달라고 매달리기만 하던 그 시절의 마음이 어느 날 이후부터 달라졌고, 그 달라진 마음속에는 ‘내가 전도해야 되겠다. 전도하러 가자.’ 하기 전에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 이야기를 해 주고 싶은 생각과 마음이 있었습니다.
내 평생소원 이것뿐 주의 일 하다가 1962년, 제가 스물두 살 때의 일입니다. 저는 복음을 깨달아 놓고도 그것이 복음을 깨달은 것인 줄 몰랐습니다. 예수를 믿었는데 한층 더 잘 믿게 되었다는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누군가 제게 제일 좋아하는 찬송가가 무엇이냐 물으면,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찬송가 512장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하고 대답합니다. 어릴 때는 맹목적으로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찬송가 411장) 하고 찬송가를 불렀는데, 언젠가 확실히 믿어진 날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구원받은 것이라고 누가 가르쳐 준 적은 없습니다. 그때만 해도 구원 여부는 나중에 저 위에 갔을 때, 심판 후에나 결정이 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죄 사함을 받았다는 확신이 있으면서도, 장로교회에 다닐 때 가졌던 구원관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확실히 믿은 그날 이후로는 자꾸만 성경 이야기를 하고 싶고 계속 성경을 보고 싶었습니다. 전에는 그렇게도 탐탁지 않게 여겼던 주일 학교 반사도 자청해서 열성을 다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아이들에게 철저히 가르쳐 주려고 했습니다. 주일 학교 시간이 끝나면 일부러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 산 중턱에 모아 놓고 들판을 내려다보았습니다. 가을이면 “넓은 들에 익은 곡식” (찬송가 308장), 봄이면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찬송가 78장) 하고 찬송가를 부르며, 그런 마음으로 그렇게 반사 생활을 했습니다.
주일이면 새벽 기도를 마치고 주일 학교 반사 활동을 하고, 10시쯤 되면 예배를 드리러 예배당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반사 회의를 한 후 청소를 하면서 의자를 정돈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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