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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 프라하에서 만난 유대인의 역사

이소영
지난 2월 말에 체코의 프라하를 다녀왔다. 체코로 떠나기 전,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는 중세 시대의 건축물이 많고, 특히 유대교 회당이 많이 남아 있어서 당시 유대인의 생활상을 알기에 유익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일주일 동안 프라하의 명소들을 다니며 체코의 역사를 배우고 다양한 박물관들을 관람한 것과 더불어 유대교 회당을 방문했는데, 그중 유대교 회당을 돌아보았던 시간을 돌이켜 보려고 한다.
예루살렘 멸망 이후 세계 곳곳으로 흩어진 유대인들은 어느 곳에 있더라도 공동체를 이루면 회당을 만들어 율법과 풍습을 계승해 갔다. 유럽에는 유대인의 그 흔적이 묻어 있는 도시들이 많이 있는데, 공동체 지구가 쇠락해 쓸쓸한 모습을 남긴 도시도 있고 전시관이나 기념관을 두어 그 역사를 잘 공부할 수 있도록 한 도시도 있다. 그 가운데 체코의 프라하는 유대인 지구가 남아 있어 유대인의 역사를 잘 살펴볼 수 있는 곳이었다. 
프라하의 역사
일정의 시작은 바츨라프 광장에서였다. 이곳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이 선언되었던 곳이기도 하고, 공산정권에 항거해 ‘프라하의 봄’ 혁명, ‘벨벳 혁명’ 등 자유와 민주주의를 외쳤던 체코인들의 굵직한 근현대사를 간직한 곳이기도 했다. 체코라고 불리기 전, 이 지역은 오랫동안 모라비아와 보헤미아로 불렸고 그 이름대로 9세기에 모라비아 왕국, 10세기에는 보헤미아 왕국이 세워졌었다. 
현재 프라하의 기본 틀을 만든 사람은 14세기의 카를 4세였다. 신성 로마 제국의 왕이 된 그는 보헤미아 왕국의 왕을 겸임하면서 제국의 수도를 자신의 고향인 프라하로 정했고, 프라하를 유럽 권력의 심장부와 창조적인 문화의 도시로 만드는 데 힘썼다.
카를 4세가 남겨 준 역사의 유산을 지키기 위해 2차 세계 대전 때 체코슬로바키아는 항전을 포기했다. 비록 나라는 독일에 점령되었지만 그로 인해 프라하는 현재까지도 유럽에서 중세의 모습을 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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