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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복음서를 읽으면서 44회
마태복음 11:20-30
누가복음 10:21-24,
2001. 12. 1. 강연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때에 책망하시되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그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1:20-30)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이 내용은 평범한 내용이 아닙니다. 아주 극단적이고 엄청난 내용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닙니다. 20절부터 24절까지는 심판에 대한 내용이고, 무언가 결정이 나지 않은 사람은 그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25절부터 30절까지의 내용입니다.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때에 책망하시되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1:20-24)
벳새다는 베드로와 요한을 비롯한 예수님의 여러 제자들이 살던 곳이었고, (요 1:44 참조) 고라신은 예수께서 가장 많이 복음을 전했던 갈릴리의 근처 마을입니다. 갈릴리에서 예수님은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고, (막 8:22-26 참조) 오천 명에게 떡을 나누어 주기도 하셨습니다. (눅 9:10-17 참조) 예수님이 이곳에서 그렇게 많은 일을 하셨는데, 이곳 사람들은 마음을 닫고 있었습니다. 물론 복음을 전하게 될 제자들이 이곳에서 나타나기는 했지만, 예수께서 가장 아꼈고 복음을 많이 전했던 이곳 사람들은 복음에 대해 냉랭하고 무관심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렇게 무관심한 사람들을 책망하시면서 심판 날에 역사에서 사라진 두로와 시돈, 소돔 같은 도시들 이상으로 심판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심판에 대해 생각할 때 죄 있는 사람은 지옥에 가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하늘나라에 간다는 관점으로만 생각하면 성경과는 거리가 조금 멀어집니다. 성경에는 심판의 순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라는 나라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또 죄의 경중에 따라서 심판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을 알면서도 믿지 않은 사람과 전혀 알지 못했던 사람은 심판의 방법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0절부터 24절까지의 내용은 심판 날에 어느 지역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도시와 마을들이 있습니다. 지역마다 풍토가 있고 그 지역 사람들의 성격이 있고 유행이 있습니다. 그로 인해 복음에서 상당히 멀어질 만한 지역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복음을 전하다가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딤후 4:10) 라고 한탄한 적이 있습니다. 이 말을 보면, 그곳은 사람의 마음이 많이 끌릴 만한 장소였던 것 같습니다. 
지구상에는 그러한 곳이 상당히 많습니다. 나라마다 지방마다 곳곳에서 무언가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이 있는데, 그런 것에 마음이 끌리다 보면 다른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게 되는 수가 있습니다. 반면에 어떤 도시는 상당히 종교적이고 차분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11장까지의 내용을 공부하면서 여러 지역들을 죽 살펴보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전도를 시작하시면서 갈릴리 근처의 도시들에 관심을 두셨는데, 그중 벳새다는 로마 황제가 자기 딸의 이름을 붙인 곳으로 사람들의 마음이 끌릴 정도로 잘 꾸며 놓은 지역이었습니다. 그곳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으니 예수께서 거기서 열심히 전도를 하신 것 같습니다. 
이때 당시 예수께서 가셨던 곳은 거대한 호수를 끼고 있는 마을들이었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바다라고도 불릴 정도로 큰 호수입니다. 바닷가 마을 사람들을 가난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문명국일수록 나라가 발달하면서 해안 지역이 먼저 번창했습니다. 그 당시에도 바다와 인접한 지역들은 상당히 번창한 곳이었습니다. 참 이상한 것은,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왜 하필 바닷가를 중심으로 인근 지역에 복음을 전하셨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닷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찬송가를 부르기도 합니다. 
나 어느 날 꿈속을 헤매며 어느 바닷가 거닐 때  
(찬송가 84장   나 어느 날 꿈속을 헤매며)
보통 바다라고 하면 무언가 이별하는 곳, 혹은 맞이하는 곳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찬송가 가사를 보면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됩니다. 지금은 사해 바다가 되어 버린 소돔이나, 심판을 받은 도시 두로는 바다와 관계가 있는 지역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언젠가 있을 마지막 때에 대해 말하면서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계 21:1) 고 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바다라는 곳은 평범하게만 여길 수 없는, 무언가 한 번 더 짚어 볼 수 있는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어릴 때 자라면서 먼 하늘을 바라보는 때도 있었고, 새파란 하늘에 구름이 둥둥 떠다니는 모습을 보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달밤에 달을 한참 쳐다보거나 별을 세어 보기도 했습니다. 또 어린 시절에 바닷가에 자주 갔던 때가 있었습니다. 가서 파도 소리를 듣고, 소라나 큰 고둥을 주워 귀에 대고는 ‘샤’ 하고 나는 바다 소리를 듣기도 했습니다. 바닷속을 들여다보면 마음이 한없이 끌려 들어갔습니다. 한겨울이어도 한 번 걸어 들어가 보고 싶은 곳이 바다였습니다. 참 이상하게도 바닷가에 가면 아무리 잔잔한 바다를 보아도 파도 소리만큼이나 많은 생각이 일었습니다. 
그런 바다의 흔적은 산 중턱에서 발견될 때도 있습니다. 성경은 이 지구가 언젠가 물속에 있었다고 합니다. 노아 때 있었던 대홍수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한 번 멸망했고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하나님께서 결정해 놓으신 다른 심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심판을 미루어 놓고 선지자들을 보내시고 또 예수님을 보내셔서 사람들에게 새로운 곳이 있다는 것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정 붙이고 살고 있는 이곳은 언젠가 쓸려 가고 없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설명해 주는 것이 바로 성경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하는 말로 세월에 씻겨 갔든 역사에 흘러 떠내려갔든 그 가운데 하나 걸려 있는 것이 있다면 그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 됩니다. 세월은 아무 뜻 없이, 이유 없이 그냥 흘러가지 않습니다.
심판에 대한 앞의 이 말씀을 읽으며 사람들은 ‘뭐, 심판하겠지.’, ‘과연 심판이 있을까?’ 등 여러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불쑥 솟아난 감정대로 아무렇게나 말씀하신 것이 절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사람들이 하기 좋은 말로 마음대로 지껄이는 것 같은 내용이 아니라 실제 있을 일에 대한 것입니다. 이대로 꼭 일어날 사실을 이야기하신 것입니다. 만일 이 심판에 대한 말씀이 사실이 아니라면, 예수님은 이 지구상에 태어난 그 어떤 사기꾼보다 더 흉악한 악질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진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확실한 사실에 대해 분명히 말씀하셨는데도 사람들은 무심히 여깁니다. 모래사장에 부딪히는 파도에 거품이 일었다가 사라지듯이 생각들이 그렇게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심판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답답해하셨던 예수님의 심정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말씀하신 이 일이 언젠가 실제로 일어날 것이기에, 이 말씀은 무서운 말씀입니다. 결코 지나쳐 넘어가서는 안 될 내용입니다.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권능을 행하셨고, 병자를 고치며 많은 것을 보이셨고,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막 2:17) 고 말씀하셨는데도, 이 사람들은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무관심했고 예수님을 도외시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 책망을 듣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요 1:10-11) 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결과적으로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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