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과거에 소설책을 읽다가, 그 소설에 나오는 인물을 글에서 묘사된 대로 그려 본 일이 있었습니다. 얼굴 모양은 어떻고, 이마는 어떻고, 눈썹은 어떻고, 콧날은 어떻고, 턱은 어떻고 그 글 내용대로 스케치를 해서 놓아두었습니다. 나중에 어디선가 그 소설에 대한 책을 찾아 읽어 보니까 제가 그렸던 그림과 아주 닮은 그림이 있었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몽타주’라는 것이 나왔나 봅니다. 강도가 어느 동네에 가서 피해를 입혔다면 경찰들이 추적할 때 사람들의 말을 듣고 받아 적습니다. ‘이러, 이러, 이러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말들이 바로 몽타주로 그려집니다. 본인의 사진도 아니고, 초상화도 아닙니다. 강도를 본 사람들이 설명한 대로 그린 것입니다.
아마 이 부자도 아브라함에 대해서 들은 바가 있었기 때문에 실물을 처음 보고도 알아보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이름을 아는 이 부자는 글을 많이 배웠고, 지식도 많았던 사람입니다.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넓은 대문 안에서 온갖 것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거지는 결코 대문 안으로 들어간 적이 없었습니다. 그가 대문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대문 앞에 앉아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마태복음 7:13-14)
멸망으로 가는 문으로 들어가지 않았던 나사로의 삶은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시다’ 하는 그의 이름 그대로였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편 23:1)
이 말은 하나님은 위대하시고, 하나님은 영광스러우신 분이고, 하나님은 나의 보호자이시며, 나의 능력이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다, 내가 그분의 보호를 받는 한 나는 안전하다는 말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이 시를 쓴 다윗 왕은 자기 양떼에 곰이 왔을 때도 쳐 죽이고, 사자가 왔을 때도 쳐 죽이고, 늑대가 왔을 때도 쳐 죽였습니다. 이 시는 바로 다윗을 보호하고 있는 하나님을 목자로,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다윗 자신을 양으로 비유해서 설명한 것입니다. 몸은 이 세상에 살지만 영혼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 하나님을 향해서 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의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사랑하오니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시편 26:8-9)
다윗의 이 시 속에는 살아있을 때의 나사로를 연상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도우심이시다’ 라는 뜻의 ‘나사로’ 라는 이름 말입니다. 이 말씀에는 ‘이 세상을 이별하는 날, 지옥에 가는 영혼으로 끝나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들과 같이 가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해 주십시오.’ 하는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내 주의 손을 붙잡고 천당에 올라가겠네날 항상 거느리시고 날 친히 거느리시네 (합동찬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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