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우리는 예수의 제자들 중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 등 몇 사람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익숙하고, 가룟 유다에 대해서도 압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떠한지, 어떤 생활을 했는지 성경에 잘 나타나 있지 않아 알기가 어렵습니다. 교회사와 관련된 책을 보면 누가 어디에서 순교를 당했다든지 하는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열두 제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행동을 했는지는 다른 책들을 통해서나 알 수 있지 성경에는 명확하게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내용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열두 명이었다는 데 관심이 생깁니다. ‘열둘’을 말할 때 항상 생각나는 것은 유대인의 열두 조상들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그 야곱의 열두 아들이 여기에 나오는 열둘과 연관성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구약성경이 완성되고 그 구약에 기록된 하나님의 계획이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나타났을 때, 이스라엘 민족의 열두 조상들처럼 예수께서도 열둘을 택하셔서 제자를 만드신 일을 연결 지어 생각해 보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에는 세계 어느 민족도 가벼이 취급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세계를 지배하다시피 하는 어떤 힘이 있습니다. 이 힘이 나타난 것은 예수 이후의 일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닙니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서로 다른 전설을 가지고 있는 세계 각 나라의 역사에 예수로 인해 한 획이 그어졌습니다. 우리가 늘 말하는 연대가 예수 오시기 전과 예수 오신 후로 나뉜 것입니다. 그렇게 BC, AD로 세계 역사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단기로 역사를 기록했었는데, 기독교 국가도 아니면서 갑자기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 예수님이 부르신 열두 제자들 가운데 대단한 인물은 없었습니다. 그중 최고의 인물이 있다면 수제자였던 베드로인데, 그는 어부였습니다. 그 베드로의 시신이 묻혀 있다는 로마 바티칸에 베드로 성당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베드로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많지만, 성경에 나타난 내용 외의 베드로에 대해서는 저는 잘 모릅니다.
그런데 이 베드로에 대해서 참 이상한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이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전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부탁처럼 전해지다가 로마에까지 이르렀는데, 그 로마 교회를 베드로가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그런 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로마 가톨릭에서는 초대 교황이 베드로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교황들은 결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총각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낫게 하신 적도 있고, 사도 바울이 ‘우리가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고전 9:5 참조) 고 말했던 것을 보면 베드로에게는 분명히 아내가 있었습니다.
제게 베드로에 대한 상식을 말해 보라고 하면, 이 책 저 책에서 읽은 것들을 죽 이야기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열두 제자라고 하면, 열둘이라는 것에는 관심이 있지만 베드로 외의 다른 제자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나마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요한이나 예수를 판 가룟 유다 정도입니다.열두 제자가 어떻게 살아갔는지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지만, 이들은 부름을 받았을 때 모두 동일하게 받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행하셨던 것과 같이 귀신을 쫓아내며 병든 자를 낫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을 이들 제자들에게 부여하셨습니다. 한 아이가 죽었을 때, 예수께서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며 “달리다굼” 하고 그 아이를 일으키신 적이 있는데, (막 5:39-41 참조) 그런 권능을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참 대단한 일 아닙니까?
그러나 그런 제자들 중 한 사람이었던 가룟 유다는 예수를 팔았고, 수제자였던 베드로도 세 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하고 저주하며 맹세했습니다. 예수를 안다고 했다가는 자신도 죽을 것 같았기 때문에 주와 함께 죽기까지 하겠다고 말했던 베드로였지만 겁에 질려서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사도행전을 읽다 보면 베드로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어떤 흔적과 같은 이적들이 조금씩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그만한 권능을 주셨지만, 그들은 절대 그 권능을 남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기록한 서신인 베드로서를 읽어 보면 내용이 굉장히 지적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그러한 이적들은 오늘날 사람들이 떠드는 미신적인 안수나 능력과는 다릅니다. 오늘날에는 누구에게든 안수하면 병이 다 나을 것같이 떠드는 사람이 있고, 아예 무당집처럼 기도원이라고 차려 놓고 안수하는 곳도 많습니다. 심지어 정통 교파의 간판을 걸어 놓고도 그렇게 합니다.
이때 예수님의 제자들이 특별한 일에 어떤 표적을 나타내기는 했습니다. ‘내가 금이나 은을 가지지 않았으나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는 능력의 표현 같은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행한다고 떠드는 일들에 비해 성경에 나타나는 안수는 상당히 단조롭고 점잖았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능력을 비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힘으로만, 말씀으로만 되었습니다. 다른 이에게 안수한다며 등을 친다든지 붙잡고 흔든다든지, 성령으로 낫게 해 준다면서 머리에 수백 번 침을 찔러서 피를 흘리게 한다든지 남자 몇 사람이 붙잡고 눌러서 초주검을 만드는 식의 안수는 성경에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기독교를 빙자해 만들어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 기독교 신비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히 13:8 하는 성경 구절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병을 고치셨던 그 힘이 오늘날 자신에게 있는 것같이 떠드는 설교자도 있고, 그렇게 안수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부흥회에 가면 강사의 소리나 행동에 따라서 신도들이 함께 들썩이는 현상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무당들이 집에 써 놓는 부적이나 ‘입춘대길’ 같은 기원문처럼 성경을 대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남용되면 문제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하는 말씀이 기록될 때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가르쳤던 선생들, 즉 앞선 이들이 어떻게 믿고 살아갔는지 자세히 주목해 보고 그 믿음을 본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동일한 그리스도의 성령이 사도들 속에서, 말씀으로 인도하고 이끄는 사람들 속에서 역사하고 계셨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잘못 받아들여서 미신처럼 해 놓은 행동들을 보고 제대로 판단하지도 못한 채 그대로 배워서 엉터리 교훈에 끌릴까 봐 이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경을 전하는 사람들 중에는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 어떻게 성경을 알게 되었고 다른 사람에게 설교를 해 왔는지 그 흔적이 없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저 어느 교회에서 언제 어떻게 안수를 받고, 직분을 받고, 어떤 신학교를 졸업하고, 전도사 생활은 어느 정도 하고, 목사 생활을 몇 년 해서 초대받아 교회를 맡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히브리서 13:7-9)
성경은 여러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를 생각하라, 저희 믿음을 본받고 누가 목자 노릇을 한다고 해도 따라가지 말라고 교훈합니다.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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