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회 성경탐구모임 2004년 7월 29일 오후
이 구원에 대하여는
디모데후서 3장 16절을 보겠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베드로전서에도 이와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1:10)
이 구절은 아무리 읽어도 금방 잊어버리고, 어렵게 생각됩니다. 도대체 주어는 무엇이고, 목적어는 무엇이며, 동사는 몇 개나 되는지 읽을 때마다 혼동됩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구절은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로 시작하고, 마지막에는 “상고하니라”로 끝이 납니다.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상고했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상고했다.” 무엇을 말입니까?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지시하시는 것”을. 그리스도의 영이 무엇을 지시했습니까?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했고, 어느 시 어떠한 때를 가리키는지”를. 이런 말입니다.
이 말씀은,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어떤 힘에 의해 감동을 받고, 그 힘에 의해서 이 성경을 “상고하고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을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전부 읽어 보아도 ‘예수’ 라는 이름은 단 한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암시하는 수많은 구절들이 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 7:14)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사야 9:6)
그런데 베드로는 이를 가리켜,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영이 지시했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 그리스도의 영이 성경 전체를 휘어잡는 힘이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꿇어앉게 되는 일이 수천 년간 이어져왔습니다.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 (요 7:46) 한 말씀도 봅시다. “이 사람의 말한 것”이 사복음서와 사도행전 1장에 나타난 것만이 전부일까요? 그 사람이 말한 것처럼 말한 사람은 왜 없었을까요? 그런 질문도 스스로 해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조그마한 유대 민족을 통해서 이 세상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그 민족을 통해 기록된 이 글에는 엄청나게 많은 내용의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에 “이 구원에 대하여는” 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이스라엘 역사를 재조명해 볼 때에 ‘구원’에 대한 이야기뿐만아니라 ‘심판’에 대한 이야기도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는 말씀에서 ‘이처럼’의 전제는 바로 앞 구절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4-15) 에 나타납니다. 이 “놋뱀”, “이처럼 사랑하사”, “이 구원에 대하여는” 하신 말씀들 전에, ‘이 구원’이라는 것은 어디서부터 나온 것일까요?
우리나라는 1945년 8월 15일에 해방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우리나라가 어디로부터 해방되었느냐’ 하는 전제가 있습니다. 어디로부터 해방되었습니까? 일본으로부터입니다. 어떻게 해방되었습니까? 미국에서 조그마한 비행기가 날아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렸는데, 그때부터 일본은 완전히 힘을 잃어 무너지기 시작했고, 그 후 우리나라는 해방되었습니다. 우리는 역사책을 보면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광복절이라는 이름 뒤에는, 역사적인 배경과 사건이 분명히 들어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성경에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라고 했던 그 “이처럼”,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한다”, “놋뱀”. 이 많은 설명들의 후면에는 엄청난 사건들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답만 쳐다보듯이 그냥 멀거니,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너무 소홀한 자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왜, 무엇 때문에 세상을 사랑하신 것일까요? “이 구원에 대하여는” 하며 말씀하셨는데,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을 말씀하신 것일까요?
그 시초는 창세기 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을 읽어보면, 이사야 14장과 에스겔서 28장에 나타나는 영광스러웠던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라는 천사가 북편 하늘 어딘가 가장 높은 곳에 좌정해 계시는 하나님의 보좌를 탐내다가 그와 “비기리라” 했던 교만한 마음 때문에 벌어진 사건을 연결시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만드시고, 이루어가시는 데 타락한 천사가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섞여 있었던가 하는 내용이 창세기 1장 첫째 날의 내용입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한 그 복잡하고 혼돈하고 공허한 거기에 “빛이 있으라”고 명하셔서 빛과 어두움을 나누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제가 창세기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 하니까, ‘저 사람, 창세기 1장 이야기밖에 할 줄 모르는가 보다.’ 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 이야기를 반복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전도를 하다 보면,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선악과 나무를 만드셨습니까? 만들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죄인 될 일이 없었을 텐데.’ 라고 질문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납니다. 저 자신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기 전에는 그런 질문을 했던 사람입니다.
빛과 어둠, 생명과와 선악과, 옳다와 아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수밖에 없는 법칙이 있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세기 1:3-4)
이 ‘빛’이라는 것과, 하나님이 분명히 경계를 지으신 ‘빛’과 ‘어두움’이라는 것이 언제부터 존재했을까요. 이 첫째 날에 나타난 빛은, 넷째 날에 나타난 빛들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지구상의 하늘에 보이는 어떤 빛과는 조금 차이가 있고 더 수준 높은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에는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6절) 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빛은 태양 빛이나 달빛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 1:4) 하신 말씀처럼, 그 빛은 생명이 되는 빛이었습니다.
첫째 날 하나님께서는 이 빛을 만드시고 좋아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첫째 날 하나님께서 ‘어두움’에 대해서는 좋아하셨다는 표현이 없습니다. 그러나 넷째 날, 큰 광명과 작은 광명을 나누시고 “주야를 주관하게 하시며 빛과 어두움을 나뉘게 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 1:18) 라고, 빛과 어두움을 나눈 것이 모두 좋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시간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지기 이전, 하나님의 낙원에서 한번 반란이 일어나고 그 결과물로 인해 우리가 살고 있는 이런 세계가 형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빛과 어두움을 나누셨듯이, 그 세계 속에는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힘과 거기에 대항하려고 하는 악한 힘이 와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대항하려는 힘을 가리켜 ‘마귀’, 또는 ‘사탄’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에는 빛과 어두움에 대한 법칙이 있습니다. 전도서의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1:5) 라는 말씀처럼, 이 둥근 지구가 자전을 하며 태양 주위를 공전합니다. 이 지구의 자전으로 이 세상에 나타나는 현상은 빛과 어두움이 우리에게 어김없이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낮에 밝다가 저녁이 되면 어두워지고, 아침이 되면 다시 밝아집니다. 또 전도서에서는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1:3) 라고, ‘해 아래’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또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같이 보내는 일평생에” (전 6:12)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하늘에 태양이 떠 있고, 그 아래 지구에서 내가 행동하고 걸어다닐 때 항상 따라다니는 그림자가 있습니다. 또, 지구에도 태양 빛이 비취는 부분의 반대편에는 어두움이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 법칙에 빛과 어두움이 있습니다.
2천 년 전 빛과 어두움을 나누신 그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쓰고 오셔서 유대인에게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마 5:37) ‘둘 중 하나만 대답해라. 여기서 지나서 나는 다른 것들은 전부 죄, 악이다.’ 라는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후에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너의 죄를 덮고 있느냐, 아니냐?’ 라는 질문에 ‘글쎄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라고 대답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예와 아니오 둘 중 하나만 대답해라’ 라는 말씀이 그냥 던져진 말씀이 아닙니다. 그분은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기뻐하시는 바가 되었고” (잠 8:30) 한 말씀과 같이 이 세상의 근원이 생성되던 때, 아무것도 없을 때에 하나님 옆에 계셨던 그 독생하신 분이 어떤 어두움의 무리가 떨어져 나가는 것을 분명히 보아 아셨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우리 인류에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하신 법칙 그대로 이 세상은 밤과 낮이 되풀이됩니다.
하나님께서 6일간 이 땅에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사람을 만드신 후에 이 땅의 한 곳에 구역을 정하셨습니다. ‘에덴’이라는 곳입니다. 에덴 동산에 사람을 두셨습니다. 이 넓은 세상에서 좁혀 들어가고, 깊숙이 들어가면 있는 ‘에덴’이라는 곳 중앙에 또 무엇인가를 두셨습니다.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세기 2:9)
바로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두 그루의 나무였습니다. 신명기에는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30:15) 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고, 예레미야서에는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니” (21:8) 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 것을 창조하신 분이 몸을 쓰고 이 세상에 오셨을 때 “너희의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는 말씀처럼, 둘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인류에게 주셨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보았습니다. 오래 전 에덴 동산에서부터 그 모습이 보입니다.
에덴은, 언젠가 계명성이라는 천사가 반란을 일으켰던 하나님의 성산의 조그마한 모형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만드신 이 우주 전체 중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는 후에 천국이 건설될 하나님의 세상입니다. 셋째 하늘에 있는 영원한 천국의 모형에 불과한 것입니다. 모든 것은 저 위에 있는 진짜를 그대로 복사해서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하나님을 대항하다 떨어졌던 “악의 영들” (엡 6:12) 이 사람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사람이 눈으로 볼 수 있는 빛과 어둠을 나누셨습니다. 그리고 그것 중에 하나를 선택하도록 하는 권한을 아담에게 부여하셨으며, 에덴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와 생명과, 둘 중 하나를 먹을 수 있는 선택권을 주신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알고 있다면 ‘아, 선악과가 없었다면 안되었구나. 선악과가 없었다면, 모든 것이 뒤틀려 있었겠구나.’ 하는 것을 느끼실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 앞에 놓여 있는 상황을 그대로 이 지구의 사람이 사는 땅 위에 옮겨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전도하러 다닐 때 ‘하나님이 선악과를 왜 만드셨는지를 자꾸 따지기 전에, 생명과를 만들어 놓으신 것을 고맙게 생각하라.’ 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 중앙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셨는데, 이 ‘나무’라는 것은 특이하게도 사람과 닮았습니다. 독일 사람들이 키가 크듯이 독일 나무들도 그렇고, 한국 사람들 키가 작듯이 한국의 나무들도 그렇습니다. 사람들과 운명을 같이 하는 이 나무들을 비롯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잠들게 하셔서 갈비뼈를 취해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이것을 미신적으로 보는 사람은 사람을 재워 놓고, 번개가 한번 번쩍 하고 치니까 갈빗대가 하나 툭 떨어져 나와서 만들어졌다는 식으로 생각하겠지만, 성경의 기록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그 손으로 일하신 것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창 2:21)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여자를 만드시기 전에 하나님은 아담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16-17)
이 “하나님이 가라사대” 라는 말씀은 성경에 사백여 번 나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되” 라는 말은 백여 번입니다. 이 말은 세상 사람들이 잠꼬대하듯이 그냥 내뱉은 말이 아닙니다. 아담에게 명하여 “하나님이 가라사대” 라고 하신 그분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율법을 주실 때에도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에게 일러 가라사대” (사 20:2) “갈대아 땅 그발 강 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겔 1:3) 라고 기록된 대로 “하나님이 가라사대” 라는 전제가 붙었을 때는 그것이 바로 계명이고, 그것이 사람이 지켜야 할 법으로 정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신 이 말씀은, 모세가 율법을 받아 글로 기록하기 전이기 때문에 온 인류가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는 엄청난 계명으로 그대로 살아 있었습니다. 그 말씀들은 지금도 살아있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죄를 범하던 날
하나님께서 아담으로부터 여자를 만드신 이후, 남자와 여자는 에덴 동산에서 자유스럽게 모든 것을 먹으며 즐길 수 있었지만 선악과만은 먹지 못했습니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창세기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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