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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8> 이제야 저는 진실로 웃을 수 있습니다

황재희
 
저는 두 형제 중 막내로 올해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저는 대구에서 살았는데 아홉 살이 되던 해부터 지금까지 테니스를 하며 운동선수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때에는 모든 것이 즐겁기만 했습니다. 교회 활동도 재미있었기에 교회도 매주 잘 다녔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점점 교회보다는 세상에 속한 일에 푹 빠져 지내게 되었습니다. 또 제 잘못으로 인해 아버지와의 관계도 원활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의 가슴에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실망감과 슬픔만을 안겨드렸습니다. 저는 말로써는 용서받지 못할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는 한없이 아버지를 좋아했지만, 겉으로는 표현이 잘 되지 않았고 잘못된 모습만을 보여드렸습니다. 속마음과는 달랐기 때문에 저도 제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힘든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래도 저보다는 부모님이 더 힘드시고, 더욱 마음이 아프셨을 것입니다. 왜 저와 같은 자식 때문에 어머니께서 눈물을 흘리셔야 하는지.... 전 부모님의 눈물을 본 순간 정말 죽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날 밤은 잠도 잘 수 없었고, 소리 죽여 울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울었다 하여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때는 제가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으니까요.
 
 
그러던 중에 아버지 회사의 일 때문에 전주라는 낯선 지역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운동 시합이 있어서 얼마 동안 대구에 혼자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부모님과 떨어져 간섭받지 않아 좋다고 생각하며 자유의 몸이 된 듯이 온통 세상의 멋에 깃들어 놀기만 하고 운동을 했습니다. 저 혼자 그렇게 지내는 동안 부모님은 얼마나 안쓰러우셨을지 이제는 좀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그때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고, 그렇게 하루하루를 의미 없이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 후 시합을 잘 마무리 짓고서야 전주로 오게 되었습니다. 대구에 있을 때는 교회를 자주 나가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속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확신하며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고, 제 자신은 그래도 착하고 교회생활도 착실하게 했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런데 전주에 와서는 은연중에 겪게 되는 텃세 같은 것도 있고 그래서 이방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때부터 정말 방탕한 생활이 시작된 것입니다.
 
 
저는 전주에 와서도 운동을 계속했습니다. 처음 보는 동기와 선후배들과 운동을 했는데 같이 운동을 해도 전 항상 외톨이였습니다. 전 그들의 타깃이라도 된 것 같았고, 그런 일이 계속 되자 결국 좋지 않은 길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저희 형 또한 테니스 선수였는데, 두 살 위의 형은 그런 제게 아무런 힘도 되어 주지 못했습니다. 전 그런 형이 너무 야속했고, 겁쟁이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무척 미워했습니다. 지금에 와서야 형이 육체적으로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할지라도 영적으로는 많은 격려와 위로를 주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왜 미처 몰랐는지, 형에게 미안하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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