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뿐인 인생저는 여행을 갈 때, 될 수 있으면 간편하게 짐을 준비하는데, 제일 큰 걱정거리 중에 하나는 비행기를 타고 가는 동안에 읽을 책으로 어느 것을 선정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늘 읽던 성경으로 할 것인지 다른 책을 고를 것인지를 며칠 동안 고민하고 준비합니다. 고르지 못하고 서너 권을 챙겨갈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는 여행 가는 동안 책을 읽습니다. 진동과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도 무언가 생각할 여유가 있습니다.그런데 긴 여행을 떠날 때는 이것이 나에게 마지막 여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전에 방송을 듣다가 미국에서 비행기가 추락해서 사람들이 죽었다는 보도를 들었습니다. 내가 아는 사람의 이름이 있어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나중에 신문을 자세히 보니 죽었다는 사람의 나이가 내가 아는 사람보다 너무 어렸습니다. ‘아,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니구나.’ 하고 안도하고 돌이켜보니 참 못된 마음이었습니다. 내가 아는 사람은 죽으면 안 되고, 모르는 사람은 죽어도 괜찮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 생각을 해 본 적도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불확실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다음 일을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감이라는 것은 있을 수 있습니다. ‘아, 오늘은 여행 안 갔으면 좋겠는데, 정말 안 떠났으면 좋겠는데.’ 생각했지만 결국 떠나서 사고를 당한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침부터 부지런히 수선을 떨면서 준비합니다. 손톱 깎고 발톱 깎고 머리 감고, 마치 어디 시집이나 장가를 가는 것같이 다 준비하고 떠났다가 죽음을 맞는 경우도 있습니다. 잠재의식인지 모르지만, 무언가 자신을 재촉하는 것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것을 두고 ‘운명’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가 사는 이 삶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내가 세상에서 사는 것은 오래 살거나 짧게 살거나 한 번뿐이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은 촛불을 켜 보신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초가 마지막 타는 장면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마지막 타는 장면이 제일 멋있습니다. 내 호흡에, 숨결에도 까딱거리던 촛불이지만, 마지막 탈 때는 누가 불어도 안 꺼질 만큼 강하게 화르륵 타오릅니다. 참 멋있습니다. 우리 삶도 그렇게 마지막이 멋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오래 산다고 해서 마지막이 좋다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맥없이 살아가는 연세 많은 분들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전 12:1) 는 말씀도 있는데, 그런 어른들 중에는 젊을 때 한 자리 하신 분들도 계시고, 주위 좋은 벗들이 많은데도 모든 것이 풀어져 있습니다. 눈동자도 초점을 잃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사색에 잠긴 것도 아닙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나도 세상에 오래 살다가 저렇게 되면 어떻게 하나....’ 겁이 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찍 죽을 수도 없고, 어떻든 살기는 살아야 합니다. 단지 일찍 끝나느냐 늦게 끝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인데, 그 동안 내 속에 들어 있는 나라는 존재가 내 육체를 끌고 고생을 하며 삽니다.
어떤 때는 날도 궂은데 몸이 불편하면 ‘아이고, 오늘 좀 직장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푹 쉬었으면 좋겠다. 전부 포기했으면 좋겠다. 이왕 한 번 누운 것 무슨 핑계를 대고라도 안 일어났으면 좋겠다.’ 싶을 때가 있습니다. 저도 그런 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그런데 어쩌다 전화가 옵니다. ‘피곤한데 전화는 왜 해.’ 하고 구시렁거리며 전화를 받았는데, 반가운 사람의 전화였습니다. ‘야, 오래간만이다.’ 하다 보면 저쪽에서 언제 몇 시에 어디에서 식사하자고 합니다. ‘그래. 너 꼭 와라.’합니다. 조금 전까지 꼼짝도 못하던 사람의 마음이 확 달라졌습니다. 몇 마디 말 때문입니다. 이 안에 있는 어떤 조그마한 힘이 밖에 있는 힘과 부딪쳤습니다. 음전기와 양전기가 부딪쳐서 번개가 일어나고 불빛이 일어나는 것처럼 우리 안에도 그런 조그마한 힘들이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살아온 삶을 돌이켜봅시다. 내가 아닌 힘 하나가 나를 끌어가고 있습니다. 거기에 내가 순응할 것인가, 순응하지 않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또 가만히 보면 그 힘 아닌 다른 힘도 있습니다.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 둘이 항상 싸웁니다. 그런 것을 보면 ‘내가 세상을 오래 살겠다는 욕심은 없지만, 사는 동안만이라도 사는 것같이 살다 마쳤으면 좋겠다.’ 하는 바람도 갖게 됩니다.
제 과거를 생각해 봅니다. 욕심이야 백 년 이백 년 살고 싶습니다. ‘한 오백 년 살자는데’ 하는 노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 몸 구조를 가만히 보면 그것은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저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런 생각을 해왔습니다. 지금에 와서 어린 시절을 돌이켜 ‘그때 내가 죽었더라면....’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우리는 초등학교 3학년, 4학년 정도의 아이들을 보며 병아리 같다고 합니다. 아주 어리게 봅니다. 그러나 그때 나이로 돌아가 봅시다. 그렇게 어렸습니까? 그때 우리들은 어른 흉 볼 것 다 봤고 어른 눈치도 다 보았습니다. 이제 와서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조그마한 꼬마들을 보고 ‘네가 뭘 안다고!’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그만큼 어렸을 때를 돌이켜보면 어렸어도 눈치는 아주 빨랐습니다.
그때 저는 매일 아파 누워 있었습니다. 방에 누워 있노라면 부모님께서 이야기하는 소리가 다 들렸습니다. 형과 동생은 밖을 뛰어다니니까 그런 대화를 듣지 못했지만, 저는 엿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는데 다 들렸습니다. 그렇게 어른이 되고 있었습니다.
저는 내가 몇 살까지 살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사람보다 오래 살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몸이 많이 망가지기도 했고 생각도 남보다 좀 많이 한 것 같았는데, 그런 저를 제가 볼 때 안팎으로 고물 같았습니다. 조용한 방에 환자가 되어 누워 있으면, 집안에서 소리라고는 탁상시계가 째깍째깍하는 소리만 들렸습니다. 종종 밥 주는 소리가 따르르륵 나기도 했습니다. 어떨 때는 잘못 되어서 자고 있을 때 따르르릉 소리가 나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면 그 아픈 중에도 기어가서 그 시계를 다 풀어 보았습니다. 나사를 하나하나 다 뜯고 풀어서 태엽도 따로 놓고 다 들어내어 이것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어떻게 시침과 분침이 돌아가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나중에 크면 이 시계 밥 주듯이, 휘발유는 한 방울도 안 들고 태엽만 감아주면 가는 자동차를 만들어야 되겠다.’ 하는 꿈도 꾸어 보았습니다. 물론 그때는 속도나 무게 계산 같은 것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그런 것이 가능할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살면서도 현실에 맞지 않는 엉뚱한 것들을 자꾸만 생각해 본 것입니다. 그런 것이 재미있었습니다. 상상하는 데는 돈도 안 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살면서 발견한 것은 그것도 언젠가는 끝난다는 것입니다. 기계도 한 번은 끝이 납니다. 그렇다면 나라는 사람도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현실에서 눈 뜨고 말하고 밥 먹고 살다가도 언젠가는 내가 나를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삶이 끝나지 않겠습니까? 그 어릴 때 그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남들은 적당히 생각하고 살아가자 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는 운명이라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어느 날엔가 책갈피 속에서 사진을 한 장 발견했는데, 그것을 보고 얼마나 소스라치게 놀랐는지 모릅니다. 초등학교 때 소풍을 갔는데, 누가 갖다 버렸는지 내 나이 정도 되는 아이가 공동묘지에 묻혀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몸은 묻혀 있는데 머리가 덜 덮여 흙 밖으로 나와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멀리서 자꾸 돌을 던졌습니다. 가서 보니 소년의 머리가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날 밤, 참 괴로운 꿈을 꾸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7년 뒤에 그 소풍갔던 사진을 보게 되었는데 너무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무덤 앞에 한 명이 앉고, 다른 아이가 그 아이의 뒤에 서서 그 아이의 어깨를 누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서 내가 앞에 아이의 어깨를 짚고 서서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그 묘지에 있는 사람은 그때 이미 죽은 것이고, 제 앞에 있는 아이들도 다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 누구 차례겠습니까? 생각하니 정말 끔찍했습니다. ‘아, 나도 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왜 나 혼자만 이런 것을 생각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인생이 답을 얻고자 하는 근본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왜 태어났는지 모릅니다. 또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죽는다는 것은 나와 별개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항상 내 옆에 붙어 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죽음 앞에 서 있는 내가 어떻게 하면 죽음을 당당하게 맞이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살 수 있을까 하는 것이 항상 숙제가 되었습니다.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저는 이런 저런 책들을 많이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어디에도 답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똑똑한 사람들이 많이 산다는 이 세상에서 ‘그냥 답 없이 살아가는 것’이 사람의 운명이라고만 결론을 내려야 하는가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날부터 새로운 힘이 하나 생겼습니다. 그것은 바로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산다면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일을 했는지 모릅니다. 몸을 움직여서 무언가를 하는 것 이전에, 내 정신과 생각이 부지런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내 생각을 부지런하게 하기 위해서 나보다 더 나은 사람들이 써 놓은 글들을 읽어야겠다는 나름대로의 작정을 했습니다.그러던 어느 날, 재수 좋게 손에 잡힌 어떤 글귀가 하나 있었습니다.
일함은 삶을 즐겁게 할 뿐 고통을 안 주어일하기 싫은 자 바로 그가 슬픔을 지닌 자자연은 우리에게 내일과 임무를 위한 힘을 준다저 게으른 자에겐 한탄뿐 삶이란 없다
노동과 근면은 영예와 빵을 주어게으름과 졸음은 벌써 죽은 것부지런한 자 장수하고 남도 그를 사랑해게으른 자 네 이름은 날도둑놈이라네
일함은 사람에게 하늘의 명령수고 근면 없이 존귀가 어디 있어영예란 땀을 요구하는데기도와 일하는 데 거기 삶의 참 즐거움 있네어느 누가 자연 안에 정지한 것 보았나 (독일 민요)
이것은 독일이 전쟁에 패한 뒤 정신을 가다듬을 때 만들어진 글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 글을 보면서 그럴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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