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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지상 과제

전도하는 마음으로 살자 4-2
이 소리는 ‘전도하는 마음으로 살자’ 1999년 7월 6일 저녁 강연을 정리한 것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이사야 43:21)
육체의 죽음, 영혼의 죽음사람이 살아가면서 밥 잘 먹고 옷 잘 입고 직장 잘 다니며 건강해 보여도, 병원에 가서 종합 검진을 해보면 건강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의사가 조직검사를 하자는 말을 해도 속으로는 ‘에이, 내가 무슨 병이 있을라고.’ 합니다. 그러나 검사 결과가 암이었다고 해봅시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힘이 다 빠질 것이고 살 길을 찾으려 할 것입니다. 살 길을 찾으려 검사를 더 해보아도 이미 늦었다며 치료할 수 없다는 진단이 내려진다면 희망은 점점 사라질 것입니다. 이 사람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건강해 보이던 육체가 그렇게 진단되면, 그 정신은 얼마나 힘이 빠지겠습니까?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우리에게는 이런 날이 오기 전에 어떤 괴로움도 이길 수 있는 힘이 필요합니다.
영혼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영혼의 갈등을 느끼지 못하고, 심판이 있는지도 모른 채 살아갑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전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차를 타고 달리다 보면 곤충들이 앞 유리창에 부딪쳐 죽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살다가 그냥 죽는다면 그렇게 죽는 곤충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인간은 결국 세상을 떠날 텐데, 그 인생의 죽음이 끝은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시작입니다.
사람에게는 죄 때문에 고통이 있습니다. 죄 때문에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모르는 것 때문에 죄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에게 진단된 말씀은 바로 로마서 3장 23절의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또 “죄의 삯은 사망이요” 롬 6:23 라는 말씀입니다. 죄의 값, 죄의 결과가 사망인데 사망은 곧 죽음입니다.‘사망’의 정의가 무엇일까요? 의학적으로는, 과거에는 우리 몸의 심장이나 뇌 등 모든 장기의 기능이 정지되어야 죽음으로 정의했는데 현대에는 조금 바뀌었다고 합니다. 현대의학에서는 장기이식의 필요성 때문에 심장, 간 등이 기능을 할지라도 뇌의 숨골 기능이 정지되면 사망으로 보자고 약속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은 완전한 죽음입니다. 뇌사 판정을 받았든 심장사 판정을 받았든 일단 사람이 죽었다고 합시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선악과에 대해서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창 2:17) 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경고를 받고도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그 후손들도 죽음을 맞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전에 아담과 하와가 직접 본 죽음이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는데, 그들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서 먼저 한 짐승이 죽었습니다. 에덴동산 안에서 짐승의 고통스러운 죽음이 지나간 것입니다.
이 사람은 자기 아들, 아벨의 죽음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후손들이 죽어갔고 그 자신도 죽었습니다. 그리고 인류는 지금까지 모두 죽어왔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신 말씀을 보면, 사람은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죽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우리는 죽음과 결탁되어 있고, 죽는 것으로 진단이 내려져 있는 것입니다.
산천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촛불을 밝혀 두고 홀로 울리라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이별의 노래)
‘너도 죽고 나도 죽는다’ 인간은 모두가 다 갑니다. 다 죽습니다. 안 갈 수 없습니다. 세상은 영원한 곳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부여된 짧은 생애를 누리다가 어디를 가는지도 모르고 떠납니다. 성경에서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한 대로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모든 인류는 개인에게 닥치는 죽음 앞에 어쩔 수 없이 사라져 갑니다. 그러나 영혼은 그렇지 않습니다. 영혼은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죽기 직전까지도 죽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발버둥치는 것이 영혼입니다. 다 늙어 이빨이 닳은 할머니도 마음은 이팔청춘이라 합니다. 마음이 아직 새파랗게 젊다는 것입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애정 소설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마음은 18세인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영혼이 늙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혼은 젊은 그대로, 허물어져 가는 몸속에 있다가 옮겨지는 것입니다.
전에 텔레비전을 보는데 머리를 곱게 빗은 예쁜 아가씨가 로마의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이 나왔습니다. <로마의 휴일>이라는 영화였는데, 그 귀여운 아가씨의 이름은 오드리 헵번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그 아가씨가 늙어서 죽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음악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질 것이며 ... 은줄이 풀리고 금그릇이 깨어지고” (전 12:4, 6)한 대로입니다. 아무리 예쁘다 해도 결국 사람은 세상에서 죽어 없어지는 것입니다. 얼마나 비참합니까? 우리는 다 죽음 앞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 죽음의 열차를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소설 속에서는 어떤 사람이 죽어서 염라대왕 앞에 갔다가 쫓겨나 세상으로 돌아오기도 합니다만,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일단 죽으면 그대로 가는 것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 9:27) 한 대로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다 죽음과 계약되어 있습니다. 죽지 않을 자신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어렸을 때 길을 걸어가다가 ‘하나님께서는 스탈린의 육체와 영혼을 분리시키셨다.’는 내용의 방송을 들었습니다. 그날은 스탈린이 죽은 날이었는데 ‘죽었다’라고 한 것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를 분리시켰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고상한 말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화가 나면 ‘너 혼내준다.’는 말을 하는데, 사람의 뇌나 심장이 팔팔하게 살아 있는데 혼이 나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죽여 버린다’는 말과 같습니다. 혼이 빠지면 죽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롬 6:23) 고 했는데, 죄의 삯인 그 ‘사망’은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어 영혼이 육체를 떠나는 것입니다.
저는 오래 전에 상여 차가 가는 것을 따라가 본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줄을 지어 “어허야 어허야 어허야” 하고 가는데, 그냥 뚜벅뚜벅 걸어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다가 길이 좁으면 가지 않고 멈춰 서서 “어허야”라고만 하며 가지 않았습니다. 장식해 놓은 만장들이 옆에 늘어서 있는 데서, 상여 차 널만 왔다 갔다 하고 발은 땅에 붙여 놓고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상주인지 누군가 와서 돈을 꺼내 세어서 건네주니까 그것을 보고 다시 걸음을 옮겼습니다. 산 계곡을 올라가는데 바윗돌이 있으니 또 “어허야” 하며 가지 않습니다. 돈을 주니 그제야 바위 뒤로 돌아갔습니다.
가서 보니 반듯하게 흙을 파 놓았는데, 두부 판에서 한 모 빼 놓은 것처럼 반듯한 구덩이가 있었습니다. 그 옆에 관을 내려 놓았습니다. 그리고 어떤 늙수그레한 사람이 두루마기를 입고 오더니 호주머니에서 군용 나침반을 꺼냈습니다. 그것을 묘 앞머리에 놓고 “참, 산세 좋다.” 하더니 어느 쪽으로 묻으라고 했습니다. 풍수 영감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식으로 어떻게 관을 내릴 것인지 인도합니다. 그리고 죽은 이의 가족들이 울어대는 가운데, 사람들이 뗏장을 덮기 위해서 무덤을 밟는데 신명나게 밟는 것입니다. 어떤 심정으로 밟는지, 잘 돌아가셨다는 것인지 마구 밟아댑니다. 그렇게 잘 밟은 뒤 그 위에 뗏장을 덮으니 머리카락 하나 없던 머리에 머리카락이 난 것 같이, 무덤이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던 한 청년이 제게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당신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저 사람 죽은 것이 너무 억울하지 않습니까? 저 사람은 삼대독자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저 사람을 데려가신 것입니까?”저는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당신이나 나나 언젠가 세상을 하직할 날이 옵니다. 누가 먼저 가든 나중에 가든 시간 차이일 뿐입니다. 애석하지만 우리는 다 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죽음을 대비하라는 부탁을 하셨습니다. 그런 준비를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성경은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전 7:2) 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지혜롭기 위해서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부터 먼저 찾아가야 한다며 선심 쓰듯 초상집에 자주 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봅시다. 이 세상은 잔칫집입니다. 희희낙락하며 즐기는 곳입니다. 그러나 또 한 편으로는 이 세상은 초상집입니다. 여러분이 사랑하고 내가 사랑하는 주님이 죽으신 곳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항상,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신 이 세상에서 내가 무슨 낙으로 즐거움을 찾을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매년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큰 도시 하나만한 공동묘지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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