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 것이 사람의 정신에 영향을 미친다우리는 지난 시간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31 는 말씀을 읽고, 예수께서 이 세상에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갖고 살고 계셨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어떤 행동을 하셨고, 그 행동을 하기로 결정하신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창세기부터 성경을 죽 읽어가다 보면, 성경에는 먹고 마시는 문제가 굉장히 중요하게 다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2장에도, 부자가 창고를 짓고 여러 해 쓸 물건들을 준비해 놓고는 자기 영혼에게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19절) 고 말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영혼은 음식을 먹을 수도 없고 마실 수도 없는데, 자기 영혼에게 위로하며 ‘먹고 마시자’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행동으로 표출하는 것과 먹고 마시는 문제가 관계있는지 없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마약을 생각해 봅시다. 마약과 관련된 TV 뉴스를 보면 ‘향정신성 물질’, ‘약물복용 혐의 체포’ 등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약도 먹는 종류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사람의 정신에 영향을 미치고 그럼으로써 행동에 큰 지장을 주기 때문에, 여러 나라에서 마약에 대해 법적으로 제재를 하는 것입니다.우리가 평소에 먹는 음식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식은 보통 맵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의 성격을 보면, 그 먹는 음식과 똑같습니다. 좋게 이야기하면 추진력이 있고, 나쁘게 이야기하면 성격이 급합니다. 이탈리아 사람들도 마늘이 들어간 음식을 많이 먹는데, 우리나라 사람들과 성격이 비슷하게 화끈합니다. 일본 음식은 자극이 없고 부드럽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상대에게 급하게 톡 쏘며 말하는 성격을 가진 사람이 드뭅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이 뇌 속에 흘러가는 생각들과 관계없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영혼아 ...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눅 12:19 )는 내용을 보면, 먹고 마시는 문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큰 숙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말씀에서 한국어에는 ‘영광을 위하여’라고 되어 있는데 영어로 읽어 보면, ‘위하여’가 ‘to’로 되어 있습니다. 즉 ‘영광을 향해서 하라’는 표현입니다. 독일어도 그렇습니다. 한국어에는 ‘위하여’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이 먹고 마시고 무슨 행동을 하든 하나님께서 받으심 직한 어떤 것을 만들어 하나님께 드리라는 의미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인간이 범할 수 있는 실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제일 첫 부분에 가인과 아벨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아담의 실패, 선악과를 먹다“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라는 말씀을 창세기에서부터 생각해 봅시다.우리 첫 번째 조상 아담은 먹는 데서 실패했습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 2:16-17) 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는데, 그 먹는 문제에서 실패해 버렸습니다. 뱀이 나타나서 하와에게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라고 꾀기 시작하니까, 하와가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고 대답합니다. 동산 중앙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었고 생명나무도 있었습니다. “죽을까 하노라”는 대답을 들은 뱀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고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하와가 나무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로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먼저 따서 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었습니다. 선악과를 먹은 후로 그들은 자신들이 벌거벗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벌거벗은 것을 알게 된 후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입니까?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해 입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찾아 나서셨습니다. 아담은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찾으시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고 두려워하여 동산 나무 가운데 숨었습니다. 아담은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분명히 옷을 해 입어 놓고도 벗었다며 숨었습니다. (창 3장 참조) 먹는 문제에서 실패한 것부터 자신을 가리는 문제에까지 실패한 것입니다. 선악과도 자기가 먹었고, 치마도 자기가 만들어 입었습니다. 모두 자신의 손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실패했습니다. 이렇게 인류 역사의 첫 번째 사람에게 일어난 이야기가 우리에게 성경을 통해 들려지고, 역사가 흘러 두 번째 아담인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부터 보겠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24-30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목숨’이라는 말이 있고, ‘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신체에 비추어 이 구절을 생각했을 때, 앞의 것은 우리가 먹고 마심으로써 유지되어가는 육체의 생명을 말하고, 뒤의 것은 외형,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설 때 가리어져야 하고, 추울 때는 무언가 입어야 하는 몸의 문제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러한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 인류가 첫 번째 먹는 문제에서부터 실패하여 하나님과의 영혼의 교통이 단절되고, 하나님 앞에 자기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서 옷을 만들어 입었을 때 직접 찾아 나서셨던 분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부르셨던 그분의 목소리가 바로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는 그분의 목소리였던 것입니다. 그 오랜 옛날 그분께서는, 첫 번째 사람이 실패하고 자기 자신을 가리려고 노력하지만 그 스스로의 손으로는 아무것도 자신의 허물을 가리지 못하는 것을 그대로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이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동산을 거니시면서 잃어버린 아들을 부르듯이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부르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약속된 때가 찼을 때, 그분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셨고 제자들에게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을 위함이 아니었던 가인의 제사창세기에는 첫 사람 아담이 먹는 문제로 실패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선악과를 먹은 후 벌거벗은 것을 알고는 치마를 만들어 입었지만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어디 있느냐”고 부르셨을 때 아담은 “벗었음으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창 3:6-11 참조) 라고 물으셨습니다. 여기에서부터 우리 인류의 복잡한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먹는 문제가 모든 문제의 발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하나씩 지어 입히셨습니다. 이 두 사람은 동산을 떠나서 자식들을 낳는데 그중에 가인과 아벨이 태어납니다. 가인은 농사를 지어서 땅의 소산을 하나님께 제사로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를 제물로 삼아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아버지인 아담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내용과 연결이 됩니다. 가죽옷을 지어 입혔다는 내용 속에는 분명히 짐승의 피가 흘려졌다는 전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피가 흘려졌다는 말이 쓰여 있지 않습니다. 숨겨져 있습니다. 아벨이 양의 첫 새끼를 제사로 드린 것에도 분명히 피가 흘려졌다는 전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피’ 이야기는 아직 성경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창 3:17-19) 라고 하셨습니다. 아담이 자기 손으로 선악과를 먹고 자기 손으로 옷을 해 입었지만, 하나님 앞에는 벌거벗은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아담의 실패로 아담은 자기 손으로 먹을 것을 농사지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가인도 똑같은 입장에서 농사를 짓고 그 소산물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 입에 집어넣어야 될 것을 하나님께 바친 것입니다.
가인이 바친 제물에도, 먹는 문제가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신 명령을 토대로 보았을 때 자신이 농사지은 것은 자기 입으로 들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저주 받은 사람이 그 저주 받은 몸으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기 손으로 농사한 것을 자기 입에 집어넣어야 되는데, 그것을 하나님께 바친 것입니다. 엄청난 실수를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가인은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자기 것은 받으시지 않자 안색이 변합니다. 거기에도 분명히 피의 작용이 있지요. 가인의 안색이 변했을 때 하나님께서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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