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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 흑암의 삶에 종지부를 찍던 날까지

강성란 | 미국
1979년 2월 3일 0시. 이날은 26년간의 나의 기나긴 흑암의 삶에 종지부를 찍은 날이었다. 어떻게 그 많던 의문들이 죄 사함을 받은 것만으로 다 사라져 버릴 수 있었는지, 아직도 참으로 오묘하다. 거꾸로 생각해보면 그만큼 죄가 많았으니 의문이 많았던 것 같기도 하다.
의문 많은 학창 시절 나는 어려서부터 귀찮을 정도로 쓸데없는 생각을 많이 했다. 예컨대, ‘눈은 꼭 이 자리에만 있어야 하나? 손만 간단히 움직이면 좁은 공간이나 높은 곳이라도 쉽게 볼 수 있도록 손가락 끝에 붙어 있으면 어떨까?’ 이런 식으로 코, 입, 귀들도 나름 그럴듯하게 여기저기로 옮기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지만, 그렇게 되면 몇 가지만 편리해지고 전부 불편하여져서 결국 다 제자리로 돌려놓자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 뿐 아니라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는 정말 곤란한 질문 하나를 아버지께 했다. “내가 부탁한 적이 없는데 왜 나를 낳으셨어요?” 대답하지 못 하실 것을 뻔히 알았지만 나에게는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이렇게 해서라도 내 생각을 알려 드려야만 할 것 같았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놀라실까봐 수위를 낮추어 농담 비슷하게 여쭈었었다.
아버지는 당신도 내 나이 때 그런 생각을 하셨으나 나처럼 어른들께 말씀드릴 수가 없어서 혼자 내리신 결론이 ‘순리’였다고 하셨다. 아버지가 이해는 되었지만 이 대답을 들은 나는 ‘결혼은 정말로 무심코 해서는 안 되는 무서운 일 중의 하나’라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만약에 내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는데 하필 나를 닮아서 “엄마, 왜 나를 낳으셨나요?”라고 한다면 나는 절대로 아버지처럼 그렇게 무책임한 대답을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나의 이상형, 즉 ‘롤 모델’이었다. 매사에 철두철미하고 냉엄하셨지만 반면에 문학, 음악, 자연을 사랑하는 아주 자상하고 가정적인 분이셨다. 또 매일 잠드시기 전에는 꼭 자기반성을 하셨다. 한 번은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가 죽었는데 자연 속에서 살아야 될 짐승을 괜히 집에서 키우다가 죽였다고 후회하시며 키우던 새들도 놓아주고, 자신도 모르게 밟아 죽인 개미가 얼마나 많을까도 걱정하셨다. 그렇게 지나치게 예민한 성격은 나에게도 유전되어서, 아버지와 나는 서로 잘 통했다. 나는 해결할 수 없는 그런 잡다한 의문들 때문에 현실에 몰두하지 못하는 내 자신이 싫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들이 결과적으로 나를 말씀으로 데려다 준 몽학선생이 되었기에, 후에는 거꾸로 감사하게 되었다.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나는 매사에 불효만 하는 것 같아 항상 죄송스럽고 애처로워서 가슴이 먹먹해지는 때가 많았다. 하지만 자라면서 아버지도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되었고, 그렇다면 이 세상에는 완벽한 사람이 정말 없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생겼다. 그래도 여전히 나에게 아버지는 최고의 존재였다. 그래서 나는 일단 37살까지만 살기로 했다. 아버지가 넉넉잡아 70세까지 사신다는 가정 하에 나도 그때까지 살겠다고 계산한 것이었다. 어차피 결혼도 안할 테고, 아버지가 먹여 살려 주시지 않으면 나 혼자 독립해서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살 아무런 목적도 능력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은 종교가 없었다. 나는 평생에 두 번 성당에 가보았다. 내 학창 시절에는 중, 고등학교 모두 입시 제도가 있었다. 평소엔 무심하게 지냈는데 중학교 3학년이 되어 입시 때가 다가오니까 문득 쓸데없는 생각이 떠올랐다. 지원자가 많으니 누군가는 떨어질텐데, 만약에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자기를 무시한다고 나를 입시에서 떨어뜨리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갑자기 불안해졌다. 그래서 가장 친한 친구에게 이번 크리스마스 때는 나를 성당에 데려 가라고 부탁했더니 그 친구가 웬일이냐며 굉장히 좋아했다. 물론 나의 마음은 숨겼다.
크리스마스 날 나는 친구와 성당 맨 뒷자리 구석에 가서 앉았다. 친구는 하얀 보자기를 머리에 쓰더니 뭘 받아먹고 오겠다며 앞으로 갔고, 나는 얼른 살짝 머리를 숙이고 하나님이라는 존재에게 “저 왔어요.”라고 인사하고는 예배가 끝나기를 기다려서 집으로 왔다. 그리고 나는 고등학교에 붙었다. 그때 만약 내가 입시에 실패했더라면 빨리 알아챘을 텐데, 붙는 바람에 붙은 이유를 확실하게 모른 채 아리송한 상태로 3년을 보내고 나니 또 대학 입시가 다가왔다. 정확히 3년 전과 똑같은 상황이 다시 찾아온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또 그해 크리스마스에도 그 친구와 그 성당, 그 자리에 앉아서 두 번째로 “저 또 왔어요.” 하고 인사를 하고 왔다. 대학에 또 붙었다. 정말 답답하고 혼란스러웠다. 가만히 있었어도 붙었을 것을 괜히 인사하러 갔었나 싶기도 해서 은근히 자존심이 상했지만, 100% 확실한 것이 아니니까 어쩔 수 없었다. ‘99%’도 ‘0’이 될 수가 있고 ‘1%’가 ‘100’이 될 수도 있는, ‘확률’이란 것을 나는 원래 믿지 않는다. 그래서 ‘일반적’이라든지 ‘비교적’이라는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비교적’ 행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그러나 나의 인생은 항상 슬프고 불행하고 비참했다. 나만 행복하면 뭘 하나? 친구가, 친척이, 옆집이, 길 가는 사람이 불행하면 그들의 불행이 내 불행이 되었다. ‘우리 집에 밥 해주러 와 있는 저 불쌍한 사람은 무엇을 얼마나 잘못했기에, 나는 무얼 잘 했기에 여기에 이렇게 사는 것일까? 입장이 뒤바뀌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니까 아찔하기도 하고 한편 다행스럽기도 한 것 같아 비굴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처음부터 어느 것 하나 확실하게 ‘내가 만든 내 것’이 없었다. 무언가 항상 떳떳하지 못하고 죄스러웠지만 겉으로는 철저하게 숨기고 오히려 유쾌하고 명랑한 사람처럼 위장하고 살았다. 그런 중에도 대학교까지 무사히 진학할 수 있었던 것은 내게 아버지 다음으로 중요한 ‘음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둡고 무거운 슬픈 음악들은 나를 위로하는 유일한 동반자였다. 대학도 음악이 있었기에 진학했고, 학교도 내가 좋아하는 작곡가(나운영 교수)가 있는 학교(연세대학교)로 선택해서 갔다. 연세대학교 작곡과는 전국에서 정원이 가장 적은 과(그 당시 10명)였기 때문에 아버지는 경쟁률이 걱정되어 다른 대학을 가라고 말리셨지만 대학에 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교수님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기에 지원한 것을 아버지는 모르셨다.
답을 모른 채 미국 유학길로그렇게 대학을 가기는 했지만 교과 과정이 현대 음악 위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와 학교는 처음부터 맞지가 않았고, 배울 것도 없다고 여겨졌다. 지금은 말할 것도 없지만 나에게 있어서 현대 음악이라는 것은 ‘소음’일 뿐이었다. 그러나 일단 교수님들 마음에는 들어야 학점이 나오니까 네 것도 내 것도 아니게 적당히 작품을 만들어서 발표도 하고 상도 탔다. 하지만 심사위원의 잣대에 의해서 내 작품이 좋다 나쁘다, 맞았다 틀렸다 평가 받는다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생각되었다. 성적이 좋고 나쁘고는 나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
음악이 내 삶의 전부인데 그마저 뜻대로 되지 않으니까 마지막 4학년 때에는 학교에 꼭 가야 하나 하는 회의마저 생겼다. 그래도 유종의 미를 거두어야 한다는 억지 목표 때문에 그나마 괜찮은 성적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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